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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08년
3. 1918년 2월에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한 후 안동 진위대 부위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국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강제 해산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경상북도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백 명을 거느리고 왜병과 접전하였다.
그때 문경(聞慶)의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강원도 횡성(橫城)의 봉복사(鳳腹寺)에서 유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나 뵈었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강년의 인품에 감복되어 그와 합진할 것을 결의하고 부하 8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右先鋒)으로 임명되었다.
9월 16일 추치(杻峙)에 복병하였다가 적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이는 전군장 윤기영이 역촌(驛村)에서 보고하기를 선유위원(宣諭委員) 권태준(權泰俊)이 지나간다고 하므로 체포하여 적의 정세를 수집한 바, 선유사 홍유석이 왜병 2백 명을 데리고 신림(神林)에서 자고 내일 추치를 넘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곧 권태준의 목을 베고 닭이 울 무렵 백남규는 좌선봉 하한서(河漢瑞), 우선봉 권용일(權用佾)과 함께 추치로 가서 복병하였다가 적을 격파하였다.
10월 거석리(巨石里)로 들어가 험준한 요새지를 찾아 유진하고 있는데,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의 직은 허 섭(許 燮)에게 맡겨졌는데 나중에 허 섭이 적에게 패하고 항복하자 할 수 없이 백남규가 돌아와 우선봉의 임을 맡게 되어 다시 의진의 진용을 수습하였다. 재정비한 진용은 다음과 같다.
의병장 이강년 도전장 윤용구(尹容九)
우선봉 백남규 우군장 변학기( 鶴基)
우익장 정연철(鄭淵 )
이즈음 이강년 의진이 용맹하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의 관동의진이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을 청해 왔으므로 의진의 형세가 자못 장엄하였다.
1908년 2월 민긍호(閔肯鎬)가 체포된 뒤에는 강원도 일대에서 이강년 의진의 활약이 가장 주목할 만 하였다.
그후 이강년 의진은 경북 일월산(日月山)을 근거지로 하여 활약하였으며, 앞서 참가한 변학기 의진을 비롯하여 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相台)·정경태(鄭敬泰)·정연철(鄭蓮哲) 등의 의병장이 합진하여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인제 백담사(百潭寺)에서 3월 12일에, 안동 서벽(西壁)에서 4월에, 봉화 내성(乃城)에서 4월 6일에, 그리고 안동 재산(才山)에서 4월 8일에 크게 적과 접전하였는데 백남규의 활약상은 특히 괄목할 만 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의병장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된 뒤에는, 김상태가 의진의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백남규는 그 일부대를 나누어 가지고 서벽·내성·아산(牙山)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죽산(竹山)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체포되어 공주구 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다가 취하하여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에는 상해(上海)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거듭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23면
- 독립운동대사전 4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3·547·5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20·242·2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7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