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7년 9월에 사의병 수백명을 이르켜
3.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기삼연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長城)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으로서 기정진(奇正鎭) 기 재(奇宰) 기우만(奇宇萬)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한말 의병운동에 관계된 인사가 배출된 집안 출신이다. 일찍이 종조숙(從祖叔)인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에게 글을 배웠는데 하루에 수백 글을 읽고 한 번만 읽으면 외고 그 뜻을 해득하였으므로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병서(兵書)를 겸해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필법(筆法)이 독특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長城)에서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는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 장군(白馬將軍)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놀랍게 능숙하여,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익혔을까?" 하고 감탄하였다.
장성에서 나주로 행군하였다가 다시 광주로 가서 회합할 때 성재가 300명의 장성의병을 거느리고 회맹소에 도착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거사하려 할 즈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사령관 이겸제(李謙濟)와 관병 5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선유(宣諭)하게 되어 의병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성재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이며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 하고 돌아와 다시 거의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진회원의 밀고로 탄로되어 결국 전주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그 날은 딸의 초례 날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동요하였으나 본인은 오히려 태연히 체포당하였다.
전주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평리원(平理院)에 이감되었다.
머리를 깎이기 직전 평리원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4개월만에 탈옥하였다.
잠시 은신생활을 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가족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영광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다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이 때 편성된 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奇參衍),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선봉(先鋒) 김 준(金準 泰元), 참모(參謀) 김엽중(金燁中) 김수봉(金樹鳳),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수용(全垂鏞) 전수용(全垂鏞) 김치곤(金致坤)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성철수(成喆修) 박도경(朴道京),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김봉규(金奉奎),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군량(軍糧) 김태수(金泰洙),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李永和),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
이상 17인의 이름으로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대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이같이 봉기한 성재는 그 후 무장(茂長) 법성포(法聖浦) 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전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교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때 모양(牟陽)의 이민(吏民)들이 의병에게 적극 협력하여 기밀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군기와 군량을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특히 김 준의 공이 컸으며, 아군의 군사 3, 4명이 전사하였다.
다시 많은 적군이 내습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군사들이 흩어지고 무기를 버리고 탈출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무기를 수습해 두었다가 틈을 타서 보내 주고 군사도 점차 모여들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듯 주민들의 협력을 적지 아니 받았지만 모여드는 군사들의 식량과 닥쳐오는 추위에 대비해야만 했다.
마침 법성포(法聖浦)에 근군(近郡)에서 거둔 많은 세곡(稅穀)이 적재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12월 7일(양력) 백여 명이 먼저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창곡(倉穀)을 탈취하고 남은 것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성 무동촌(舞童村)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이 때의 전투양상은 소단위의 유격전이었다.
특히 김 준의 유격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점차 추워지자 도망병이 생긴 것이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을 공격하려는데 기밀이 누설되었으며, 추위로 병든 군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서우산(犀牛山)속에서 군사를 휴식시킨 후 나주(羅州)의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성재는 의진을 이끌고 담양(潭陽) 금성(金城)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험준한 곳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설을 지낸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사졸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완전 포위 당하여 피아간에 사상자가 4, 50명이나 난 격전을 치렀다. 성재는 최후를 각오하고 의관을 정비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출한 성재는 순창 복흥산(淳昌 福興山)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활동의 한계를 느낀 성재는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성재는 구수동(九水洞)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쉬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설 상을 받을 때 적 수십 명이 들어와 성재를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성재는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을 해치지 말라."고 하면서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박되어 교차(轎車)로 담양(潭陽)으로 압송되었다.
담양 군수가 거만한 언사로 농을 하자 크게 꾸짖기를, "너는 선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왜놈의 종노릇을 이렇게 심하게 하느냐." 하였다.
담양에서 다시 광주(光州)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차를 메고 가는 이들이나 눈물을 흘려 길이 지체되었다.
호송하는 왜병들은 생변(生變)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칼날을 휘두르며 재촉하여, 그날로 광주에 이를 수 있었다.
수감된 성재는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이 시를 미루어 보아 그는 자신의 의병활동이 끝내 성공하여 일인들을 한반도 밖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한 확신이 꺾였을 때 그의 비통한 심회를 이상과 같이 담담하게 노래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김 준은 창평(昌平)에서 일군 연대장 길전(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을 추격하다가 성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병 30명을 이끌고 탈환하고자 추격하였으나, 이미 경무서에 수감된 뒤였다. 길전 이하 다수의 일병이 사상한 것에 대한 복수로 일인들은 성재를 무수히 난자하였으며 결국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시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시신의 형세가 너무 참혹하여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어 염하여 시의 서쪽 서탑등(西塔嶝)에 빈(殯)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일인들도 의롭게 여겨서 문책하지 않고 목비(木碑)를 세우고 호남 의병장 기삼연이라고 썼다.
성재 사후에는 그의 산하에 있었던 부장들이 독립된 의진을 형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호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 준·전수용·이석용·심남일(沈南一)·김봉규·박도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지휘하에서 전략을 수행하다가 검거되어 형을 받은 인물들로 박도경(朴道京, 慶耒)·김공삼(金公三, 奉奎)·이중백(李仲栢)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며, 그밖에 오성현(吳成玄)·박재두(朴在斗) 등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198, 199, 2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96, 597, 59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00, 301, 5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712, 713, 739, 776, 777, 778, 779, 780, 819, 820, 82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11, 613, 623, 626, 627, 628, 630, 631, 633, 634, 6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