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0년 1월
3. 1920년 2월
4. 1920년 2월
5. 1920년
(
6. 1920년 7월
(Reel No. 9357
(이상 6항까지 동아일보 1935. 10. 20 일자)
7. 년대미상
8. 1922년 8월
9. 1922년 9월
10. 1934년 마침내
11. 1936년 5월 13일
12. 1936년 5월 19일 12년 징역 언도(동아일보 1936. 5. 30)
13. 서울 형무소로 이감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17세의 나이로 간도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18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1919년에는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 등과 더불어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7월에는 관전현(寬甸縣)에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조직에 참여하여 오동진을 총영장으로 하고, 그는 장덕진·조병준(趙秉準)·윤하진 등과 함께 그 막료가 되어 무장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7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에서 일대 무장투쟁을 결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결사대를 3대로 나누어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는 제2대의 결사대장이 되어 장덕진·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입국하다가, 안주(安州)에서 일경을 만나자 이를 사살하고 무사히 평양에 들어왔다. 그는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동년 8월 3일 평남 경찰부 청사에 폭탄이 터져 장벽 일부가 파손되고 경찰관 두명이 폭사하였다.
또한 평양시청에도 폭탄이 던져졌으나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거사후 그는 장덕진과 함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본영으로 귀대하였으나, 일경에게 체포된 동지 안경신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도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본영에 돌아온 후 재정부관(財政副官)이 되어 관전현 누하석항자 대황구 만보황자(漏河石抗子大荒溝萬寶黃子)에 광복군총영 통신사무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1921년 2월에는 군자금 1만 5천원을 모금하여 상해(上海)를 왕래하며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통하여 '관리에 충고함', '자본가에 경고함', '친일자에 주고(注告)함' 등의 경고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1922년 8월에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김성득(金成得)·방달성(方達成)·장덕진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 노선을 통일해야한다는 '선언(宣言)'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가 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오동진과 협의한 다음 후일의 활약을 위해 중국 하남성에 있는 오패부의 군관단에 입단하여 약 2년간의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27년 오동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 그는 인쇄책임자가 되어 독립신문을 만주, 미국 등지에 송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임시정부에도 관여하였으며,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안창호·이유필·이시영 등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934년 5월에 상해의 불란서 조계에 근거를 두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 영사관에 탐지되어 동년 9월 23일 체포되었으며, 본국으로 송환되어 수년간의 재판 끝에 1937년 2월 8일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67·824·8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8·274·4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2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01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41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7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4·260·302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70면
- 기려수필 29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6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