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함남 원산(元山)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곽명리(郭明里) 등 12명의 동지와 더불어 수천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3개월에 걸친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고향에서 장 식(張植)·전영직(田永稷)·이우영(李愚榮) 등과 함께 울진청년회(蔚珍靑年會)를 조직하여 전영직이 회장을 맡고 그는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회는 매월 한 차례씩 월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로 ≪울진청년회보≫를 간행하였다. 그는 1920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념하며 항일의 정신을 다지다가 일경에 붙잡혀 7일 동안 구금당하였다. 동회는 1921년 집행위원제로 기구를 개편하여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동회를 이끌었다.
또한 전영직·임원화(林元華)·장인환(張仁煥) 등의 동지들과 함께 1922년 4월 17일 울진강습소를 설치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동 강습소는 1925년 울진 제동학교(濟東學校)로 승격되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1923년 7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파견된 안희제(安熙濟)를 도와 군자금 330원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으며 1924년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 울진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26년 만주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펴다가 1927년 3월 일경에 붙잡혀 1928년 10월 5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1월 15일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1년 울진에서 윤두현(尹斗鉉)·진기열(陳基烈)·남일성(南日星)·주진황(朱鎭晃) 등 10여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공작당(朝鮮獨立工作黨, 일명 : 蔚珍工作黨)과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고 동지규합에 힘썼다. 동당은 항일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로서 조직부와 선전부의 조직을 갖추고 동년 9월 극동공산주의자동맹(極東共産主義者同盟)으로 개칭하였다. 동 동맹은 이후 각 리(里)에 야학을 설치하여 항일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1934년 2월 잔치집에서 '독립행진가'·'혁명가' 등을 고창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중 일경에 탐지되어 동지인 전범수(田範秀)의 집이 수색당한 결과 〈농민조합선언강령〉등의 문서가 발각됨으로 인하여 동동맹의 조직이 노출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는 1935년 7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9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23면
- 동아일보(1928. 9. 16)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3·1운동실록(이용락) 852·853면
- 사상휘보 4호 9∼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