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평안북도 자성(慈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이재명(李才明) 등과 함께 여연면 중상리(閭延面中上里)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당시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인 이재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초 이재명이 우연히 만주 임강현(滿洲臨江縣)에 살던 정 단(鄭丹)을 길에서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김종하(金宗河)·김종선(金宗先) 형제에게 이를 등사하게 하고 태극기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이재명 등과 다시 만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거사일을 일요일인 3월 23일로 결정하였다.
3월 23일 아침에 김종하가 자전거 뒤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시가지를 한바퀴 돌아 주민들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거사 예정시간인 오후 1시 중강 다리밑에 수많은 기독교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이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로 나와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이 중상동(中上洞)과 헌병대를 거쳐 건하동(乾下洞) 일대를 두바퀴 시위행진하고 세바퀴째 행진하던 중,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금과 독립신문 배부 등을 통하여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0여차례에 걸쳐 검속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94·8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