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천도교인이던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천도교도들과 함께1919년 3월 4일 평남 성천(成川)에서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성천의 독립만세시위는 천도교 성천교구장인 이돈하가 2월 하순 평양(平壤)에서 열렸던 대교구장회의(大敎區長會議)에 참석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4일 오전 11시를 거사일시로 결정하고, 이대수(李大秀)를 구룡(九龍)·능중(陵中)면에, 박치상(朴緻祥)을 삼덕(三德)·쌍룡(雙龍)면에, 석이원(石履元)을 사가(四佳)면에 급파하여 천도교인들에게 연락하도록 하였다. 3월 4일 오전 11시 읍내 천도교구당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4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읍내 상부리(上部里)에 있는 헌병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최우겸도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대 앞에 도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야만적 발포로 인해 시위군중 가운데 2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보다 적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비밀결사 공성단(共成團)에 가입하였다. 공성단은 1920년 봄 평양에서 유인석(柳麟錫)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연결되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군자금 모집과 독립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현기정(玄基正)을 단장으로, 총무·외교·재무·인사·출판·교통 등의 부서를 두었다. 그는 성천 출신 박도현(朴道鉉) 등과 함께 성천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平安南道誌(編纂委員會, 1977) 989면
- 成川郡誌(編纂委員會, 1989) 502면
- 判決文(高等法院, 1919. 9. 18)
- 集會取締狀況報告(通報)(京鐘警高秘 제4318호), 思想에 關한 情報(副本)
- 東亞日報(1922. 8. 20)
- 韓國獨立史(金承學, 1965) 상권 215면
- 大韓獨立抗日鬪爭總史(金啓業, 1989), 9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