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전남 (全南) 장성 (長城) 에서 기삼연 (奇參衍) 의병장 (義兵將) 이 거의 (擧義) 함에 입진 (入陣) 하여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무등촌 (無登村) 및 어등산 전투 (魚登山戰鬪) 에 참전 (參戰) 하여 공적을 세웠으나 기삼연 (奇參衍) 의병대장 (義兵大將) 이 피체 (被逮) 되고 그 후 김태원 (金泰元) 의병장 (義兵將) 이 또한 전사당 (戰死當) 하며 전해산 (全海山) 의병장 (義兵將) 이 대구감옥 (大邱監獄) 에서 우해 당 (遇害當) 함에 마음에 통분 (痛憤) 하고 있을때 적 (敵) 으로 부터 동화 권유 (同化勸誘) 를 받자 일사보국 (一死報國) 을 맹서 (盟誓) 하고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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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광산(光山) 사람이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1906년 3월 박현동(朴玄東)·조경환(曺景煥) 등과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며서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고 한다.
1907년 2월에는 인근 장성(長城)을 무대로 하던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인 기삼연(奇參衍) 의병진의 선봉장 김태원(金泰元) 휘하에 들어가 항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1월 1일 무등촌(無登村) 전투에서 일군장교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을 총살하고 휘하 일군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고, 기삼연 의병장이 구수동(九水洞) 민가에서 일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작전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김태원 의병장이 1909년 3월 어등산(魚登産)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같은 해 4월 그는 다시 전해산(全海産) 의병진으로 옮겨가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수일 동안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8월 5일 전해산 의병장이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던 차에 일제로부터 동화(同化) 권유를 받게 되자 '귀가 더렵혀졌다'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光州誌(全) (1964年 發行) 150·411·819面
- 光州金氏 文 公派大同譜(1960年 : 1版) 4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95·39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