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서 수학한 후, 감리교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申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그는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던 1919년 2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찬동하여, 27일에는 이인환(李寅煥)·함태영(咸台永)·박희도·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등과 함께 정동교회(貞洞敎會) 내에 있는 이필주(李弼柱)의 집에 모여 천도교측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상임간사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2월,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백만 재만동포들이 중국 관헌들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박해받는 일이 벌어지자 각 사회단체의 주요인사들이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설립하였는데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후 1928년 중반 미주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 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또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고등경찰요사 22·4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391·402·628·706·710·85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52·753·75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2·29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3·147·14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90·566·61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5·29·39·41·43·44·46·50·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