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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924년 1월 12일
ㆍ1924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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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그는 1909년경,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희제(安熙濟)·김홍량(金鴻亮)·신백우(申伯雨)·남형우(南亨祐) 등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남대문(南大門) 밖에 소의학교(昭儀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의 일선에 나섰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홍면희(洪冕熹)·안상덕(安商悳)·이규갑(李奎甲) 등의 인사와 함께 세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주로 연락과 준비의 임무를 맡아, 홍면희·이규갑 등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하여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同化藥房)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활동을 폈다. 이일로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동년 8월에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직후 그는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단)에 가입·활동했다. 역시 그는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聯通本部)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하는 한편 대동단이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인 동년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하려 한 독립만세시위에 강 매(姜邁)와 함께 서울의 7개 학생단체들의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민 강 등이 통솔한 학생청년단체는 연통단(聯通團)·중앙단(中央團)·중앙청년단(中央靑年團)·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불교중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이었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됨에 따라 동년 11월 1일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1924년 1월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는데 1924년 3월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1. 3. 23 경성복심법원)
- 조선민족운동년감 185·18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16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229·4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34·1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7·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871·88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9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8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