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함북 무산(茂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21일 함북 청진(淸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태형 90도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그후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과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가 합류하여, 전국적 규모를 가진 노농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1924년 4월에 조직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결성과정에 참여, 50여명의 중앙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어 동 동맹을 이끌었다. 그는 청진지방을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권익옹호투쟁을 펼쳐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였고, 1925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서울청년회 계열이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의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 종래 노동자·농민운동의 혼합조직이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운동의 성격에 따른 단일조직으로 분립하기로 결정하여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으로 나뉘었는데 그는 이낙영(李樂永)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노동총동맹의 24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일제는 조선노동총동맹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집회와 행사를 금지하였으므로 동 동맹은 1929년 7월 중앙지도기관을 보선하였는데 그는 재차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과 좌·우익의 민족통일전선(民族統一戰線)인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펴던 중 1930년 12월 일경에 붙잡혀 청진지방법원에소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107면
- 동아일보(1929. 7. 25)
- 0 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