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58
성명
한자 高濟亮
이명 高聖弼, 麟峯(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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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왜적(倭敵)에 항거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10년간 무력투쟁을 하다. (이상은 본인제출 공적서(功績書)에 의한 기재임)

2. 을미지변(乙未之變)창의 거병(倡義擧兵)하여 북상(北上)하다가 고종(高宗)선유(宣諭)해산(解散)되었다.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 p.71)

3. 을사조약 체결(乙巳條約締結)됨에 재기(再起)하여 고광순(高光洵)대장(大將), 본인은 부장(副將)이 되었다.

4. 1907년 5월에 능주(綾州)를 공략하였으나 별 무전적(別無戰績).

5. 1907년 8월에 동복(同福)을 공략하여 승리하고 연곡사(燕谷寺)본영(本營)을 설치하였다.

6. 화개동(花開洞) 공략에 실패하였다.

7. 호서의병장(湖西義兵將) 김동신(金東臣)지리산(智異山) 문수암(文洙菴)점거(占據)함에 왜병(倭兵)이 추격하여 옴으로 본인은 왜병(倭兵)교전하여 손해(損害)를 줌. 손해(損害)를 본 왜병(倭兵)연곡사(燕谷寺)복멸(覆滅)할 계획으로 대거 공격(大擧攻擊)함에 왜병(倭兵)과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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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호남의진의 거봉인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의 족조(族祖)이다.

이들은 소시적부터 마음이 맞고 노선이 같아서 함께 지내었기 때문에 후에 의병을 일으켜 고락(苦樂)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들 고흥 고씨 일문의 청년 지사들은 녹천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는데 임진왜란시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高敬命)의 후예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던 듯하다.

고제량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마침 1906년 4월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태인(泰仁)에서 거의하여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고제량은 녹천과 함께 칼을 빼어 들고 면암을 찾아갔으나 이미 의거에 실패하고 여러 문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된 후였다.

다시 이들은 기우만(奇宇萬) 백낙구(白樂九)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언약하고 기일을 정하고 돌아갔는데 이일이 누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모두 붙잡혀 갔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녹천을 주장(主將)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장(副將)이 되어서 창평 저산 분암(昌平 猪山 墳庵)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렸다.

그때 그들의 휘하에는 고광훈(高光薰) 고광수(光秀 光德) 고광채(光彩) 등의 일문 청년들과 윤영기(尹永淇) 박기덕(朴基德) 등이 종사하였다. 이들은 1907년 1월 24일(음력 1906년 12월 11일)에 각기 부서를 정하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들은 함께 연합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동지를 구하고자 여러 의진과 교섭을 하던 중 1월 그믐에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로부터 남원 합동 작전을 꾀하자는 연락을 받고 행군을 개시하였다.

2월 초 남원으로 진격하였는데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는 계획이 적에게 탐지되어 이미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그것을 모르고 녹천 의진은 군사를 3부대로 나누어 적의 진영을 육박하여 포를 쏘았는데 날이 밝자 적이 총으로 대항하였다.

의병들은 툭 터진 거리에서 몸을 노출시킨 채 대적하다가 실수할까 염려되어 마침내 군사를 몰고 후퇴하였다.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綾州 지금의 和順郡) 사림(士林)들의 협력을 얻어 1907년 4월 25일(음 3월 13일)에는 윤영기(尹永淇) 등과 함께 화순읍을 진격하여 점령하고 적 거주민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튿날 다시 동복(同福)으로 진군하였으나 광주부(光州府)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 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군사가 흩어졌다. 이때 광주부 출신 몽암 신덕균(蒙庵 申德均)이 의병진의 동복 진격 소식을 듣고 의병진에 참가하려고 종제인 상철(相徹) 등과 함께 급히 동복으로 달려왔으나 군사가 이미 패하여 흩어진 후이었으므로 훗일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가 재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8월경 고제량은 전의 녹천 의진의 여러 의사와 신덕균과 함께 창평 제심리(昌平 齊心里)를 중심으로 집합할 것을 연락하며 대규모의 재기를 계획하였다. 9월 11일(음 8월 4일) 녹천을 도독(都督)으로 삼고, 고제량은 선봉이 되어서 각 부서를 정하고 천지신명께 제사 드리고 맹서한 다음 9월 12일 행군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동복 땅을 지나 장차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여 장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곡성군 구룡산(谷城郡 九龍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참모 신덕균이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을 먼저 칠 것을 제의하여 왔다. 9월 14일 새벽 이들은 군사를 회군(回軍)하여 동복읍으로 들어가서 도포사(都暑士) 박화중(朴化中)의 총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읍을 점령하고 적들을 궤산시켰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으로 들어가 유진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니 인근에서 의진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군사들이 자진하여 참여하니 군사가 무려 천여 명에 이르렀다.

10월 11일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갔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산 포수가 많고 골짜기가 깊어 천험(天險)에 해당하여 군사를 머무르고 예기를 기를 계획에 가장 적합하였다. 그래서 군기(軍旗)를 세우고 기에는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 3글자를 썼다. 이 때에 적이 화개동에 들어왔음을 알고 군사를 보내어 모두 사살하도록 명하였으나 적 2명이 탄환을 맞은 채 새벽 안개를 타고 빠져나갔다. 이들로부터 약간의 무기를 노획할 수 있었으나 9월 18일(음) 적이 북쪽의 문수암을 불태웠다. 그곳에는 호서의병장 김동신(金東臣)이 자주 와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적은 물러가 화개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제량과 녹천은 병든 군사 몇 명과 함께 본진에 남고 나머지 군사를 2대로 나누어 고광수와 윤영기에 맡겨 적을 치게 하고 승첩의 보고를 기다렸다. 이때 적은 이미 화개동을 비우고 쌍계사(·溪寺)로 향하는 것 같이 꾸미고 영·호남의 관군을 소집하여 밤중을 기다렸다가 새벽에 연곡사를 포위하고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 순찰 돌던 군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급히 고하였다. 적이 포를 터뜨리며 쳐들어오자 병든 군사들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녹천이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벌써부터 작정했으니 공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가라" 하였다. 그러나 고제량은 "당초에 의를 위해 함께 거사했으니 종말도 의를 위해 함께 죽는 것이 직책이다. 어찌 죽는 마당에 다다라 홀로 모면하려 한단 말인가·" 하였다.

형세가 부득이 해지자 녹천은 아우 광훈에게 "너는 군인 명부를 없애서 후환을 막아라" 하고 담장 밖으로 뛰어 나가니 고제량이 그 뒤를 따랐다. 끝내 녹천과 고제량은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운봉(雲峰)·함양(咸陽)·순창(淳昌)·정읍(井邑) 등지로 흩어져 산발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약상은 정미의진의 선구로서 후기의병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02, 403, 59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99, 637, 6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86, 287, 288, 3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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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제량 자 : 성필(聖弼), 호 : 인봉(麟峯) 전라남도 담양(潭陽) 후기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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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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