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함경남도 고원(高原)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19일 김명국(金明國)·엄치인(嚴致仁)·김중생(金重生)·맹태유(孟泰裕)·김한수(金翰洙)·오창옥(吳昌玉)·김대복(金大福) 등과 함께, 고원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1일 이후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계속되어, 고원헌병분견소에서 만세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군내 각 시장을 폐쇄하는 등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천도교 신도인 김명국을 만나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여 찬성을 얻고 거사일을 3월 19일로, 장소를 하시장(下市場)으로 결정하였다.
또 그는 고원경찰서 고등게 형사 보조원인 이양화(李陽化)를 설복시키고, 엄치인·김중생·맹태유·김한수·오창옥·김대복 등으로부터 찬성을 얻어냈다.
이에 그는 그들과 18일 하고읍리(下古邑里)의 소나무 숲에서 만나, 3백여매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9일 약속한 하시장에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한 후, 이들과 함께 석연리 덕지장(石淵里德池場)으로 행진하였는데, 이때 1백여명의 기독교인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헌병의 무력저지를 받고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985·98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