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권중흠은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首比面) 광석동(廣石洞) 출신이다. 1908년 음력 7월부터 1910년 6월까지 경북 봉화·순흥, 충북 영춘·충주, 강원도 영월 등지에서 김상태의진(金相泰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死刑) 순국(殉國)하였다. 김상태는 충북 영춘군 남천 출신으로 1896년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이강년과 함께 참여하였다.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이강년과 함께 따라갔다가 3년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5년 7월 충북 단양에서 정운경과 함께 창의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자 김상태는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순흥·봉화·풍기·영춘·영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순국한 뒤, 그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아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1909년 3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등 1911년 6월까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김상태부대는 소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가면서 각처에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최성천(崔聖天)과 연결하여 1910년 3월 26일 예천군 위라면 오천시장에서 일본인 산내은삼랑(山內銀三郞)을 살해하였고, 동년 7월 18일에는 안동군 천전의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공격하여 교사 등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상태·정경태·최성천·윤국범 등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1910년 11월 25일부터 동년 12월 20일에 걸쳐 소위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상태는 정경태 등과 함께 소백산을 근거지로 순흥의 연화동에서 부하 14명을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1911년 6월 14일 순흥의 연화동에서 일본군 대위 편종겸이 거느린 토벌대의 야습을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斷食) 순국(殉國)하였다. 권중흠은 1907년 음력 7월 김상태 휘하의 감관장(監官將)으로, 경북 봉화·순흥, 충북 영춘·충주, 강원도 영월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후 약 3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순흥·풍기·봉화 일원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11년 10월 23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동년 12월 25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1911. 10. 23)
- 判決文(大邱控訴院:1911. 11. 30)
- 判決文(高等法院:1911. 12. 12)
- 刑事事件溥 ·朝鮮總督府官報(1913. 5. 31)
- 十一月分 暴徒狀況月報(1909. 12. 20) 暴徒에 관한 編冊
- 三月分 暴徒狀況月報(1910. 4. 16) 暴徒에 관한 編冊
- 四月分 暴徒狀況月報(1910. 5. 16) 暴徒에 관한 編冊
- 五月分 暴徒狀況月報(1910. 6. 20) 暴徒에 관한 編冊
- 六月分 暴徒狀況月報(1910. 7. 23) 暴徒에 관한 編冊
- 十二月分 暴徒狀況月報(1910. 1. 21) 暴徒에 관한 編冊
- 暴徒首魁調査表(1910. 2. 1) 暴徒에 관한 編冊
-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6(國史編纂委員會) 義兵篇ⅸ 83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535~5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