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들은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親日走狗輩)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강찬오는 1908년 음력 3월 성익현(成益鉉) 의진에 합류하여 약 40~300명과 함께 화승총을 휴대하고 경상북도 영양·봉화·강원도 삼척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성익현 의진은 이강년(李康秊) 의진 및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1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1908년 5월 봉화군 서벽리(西璧里)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하사 1명과 순사 3명 및 통역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강찬오는 1909년 봉화·영양 등에서 20~30명의 부대를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6월에는 봉화군 상동면(上東面)에서 정기철(鄭基哲)과 함께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일본 군경과 약 2시간의 전투를 벌이는 등 일제에 위협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에 붙잡혀 1910년 9월 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 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재판소:1910. 9. 9)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984) 제18권 1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