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481
성명
한자 李秉岐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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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27년부터 광복시(光復時)까지 14년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언어 문화(言語文化)를 지키고 닦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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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27년 2월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같이 "한글사(社)"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7. 2. 21)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4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62·470·501·512·969·993·997·1011·1143·1147·11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83면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북도 익산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생가 이병기선생 생가 전라북도 익산시
2 기념관 가람문학관 전라북도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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