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을사조약 (乙巳條約) 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민종식 의병장 (閔宗植義兵將) 이 의병을 일으키고 남포 (藍浦) 에서 홍주성 (洪州城) 을 향하여 행군할 때 지방부호 (地方富豪) 창고 (倉庫) 를 열어 군량미 (軍糧米) 를 제공하였으며 1908년 광천 (廣川) 덕명학교 (德明學敎) 를 설립하여 영재 (英材) 배출에 주력하였으며 1919. 3. 18 충남 (忠南) 홍주군 (洪州郡) 광천면 (廣川面) 독립만세 시위 (獨立萬歲示威) 거사 (擧事) 를 주동하여 독립선언서 510여 매를 등사 배부하다가 피체 되어 징역 8월을 받아 미결기간 (未決期間) 을 합산하여 9월 10일간의 옥고 를 치른 주동자로서의 공적과 의병에게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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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藍浦)에서 홍주성(洪州城)을 향하여 행진할 때 지방부호의 창고를 열어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1908년 홍주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으면서 영재배출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광천(廣川)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 57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고 후진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3월 18일 홍성군 광천면에서 오인섭(吳仁燮)·이명종(李鳴鍾)·최응모(崔應模)·성인배(成仁培)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500여매를 등사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하는 등 시위 준비를 위해 활동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연산서씨시조유래(정문사, 1988. 6. 30) 21·22면
- 홍양사(전) 31·32면
- 한국일보(1967. 3. 30)
- 판결문(1919. 4. 28 공주지방법원)
- 홍성군지(홍성군지편찬위원회, 1980. 12. 15) 555면
- 충절의 고장 홍주(홍주군수, 1982. 3. 31) 72·73면
- 홍주의병실록(홍주의병유족회, 1988. 9. 30) 5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