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황해도 수안(遂安) 사람이다.
1922년 서울의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도만(渡滿)하였으며, 1925년 1월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가 탄생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이탁(李 )·김동삼(金東三)·이청천(李靑天)·현정경(玄正卿)·김상덕(金尙德)·이진탁(李辰卓)·김찬(金燦)·이규동(李圭東) 등과 함께 중앙위원에 임명되어 적극 활동하였다. 1928년에는 길성(吉城)의 동북에 있는 대둔(大屯)에서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대표들이 모여 회의할 때 정의부 대표로서 참가하는 한편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교육위원장 및 외무부 집행위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민중부장으로도 일하였다.
1931년 10월 이래 일본군이 남만의 조선혁명군과 혁명당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하자 1931년 12월 17일 간부 30여 명은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에 있는 한교(韓僑)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긴급 중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이호원(李浩源)·이관웅(李寬雄)·이종건(李鍾建)·양하산(梁荷山)·김보안(金輔安)·이동산(李東山)·장승언(張承彦)·이시열(李時說)·장세용(張世湧) 등 15명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는 한편 선전부장직을 맡고 적극적인 대일투쟁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는 중·한 항일동맹회를 조직하여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중국인 왕봉각(王鳳閣)이 맡았다. 조선혁명군의 중앙집행위원장이던 이호원이 체포된 뒤에는 그가 중앙집행위원장 대리가 되어 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梁世奉)과 함께 작전과 전투에서 행동을 같이하였다. 양세봉과 그는 문무(文武)의 쌍벽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양세봉이 전사한 후에는 그가 사령(司令)의 대리까지 겸하게 되었으나, 1936년 8월경에는 혁명군이 거의 해산한 상태였다. 그는 부하 7명을 거느리고 흥경현 동창대(興京縣 東昌臺)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토벌대를 만나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 결과 봉천(奉天) 일본 헌병대에서 1개월여의 악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국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5권 699면에는 1933년 8월에 흥경현(興京縣) 동창대(東昌臺)에서 적에게 습격을 받아 고이허(高而虛)·김붕암(金朋岩) 등 2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937년 5월 일본 강산(岡山) 지방재판소 검사 강본오시(岡本吾市)가 보고한 "만주에서의 중국공산당과 공산비(匪)" 제3편 여론(餘論)에는 그 당시까지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089, 1090, 109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35, 149, 152, 153, 163, 170, 171면
- 항일순국의열사전 142, 143, 26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583, 584, 586, 619, 622, 637, 641, 6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1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33, 33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0, 281, 282, 284, 286, 423, 429, 442, 449, 489, 521, 56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