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9 동지
3. 1921.12.2 무기와 탄약을 준비하여
4. 1921.12.5
5. 1923.5.25
6. 1923.11.13 상고심에서 사형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음.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1919년 3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입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동지 강병관(姜秉官)과 함께 혼춘(琿春) 황구(荒溝)에서 러시아 군대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여 국내진입을 도모하였으나 일본군의 출동으로 좌절되었다.
1920년 8월 20일에는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 직후 대규모의 군사행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김병관(金秉官)·강석훈(姜錫薰)과 함께 대한독립은 오로지 국내 일본관청의 파괴와 일제 주구(走狗)의 암살, 기타의 직접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성취된다고 생각하고 1920년 12월 초순에 노령(露領) 「시지미」에서 임시대한독립군(臨時大韓獨立軍)을 조직하였다.
대장에는 그가 선출되었고 문창학(文昌學)·김병관·강석훈·최시능(崔時能)·최영찬(崔英燦) 등이 가입하였으며, 그들은 「워싱턴」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동대(同隊)의 실적을 보여주기 위하여 국내에 들어가 일경과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파괴는 대원이 50명이 된 후에 거행하기로 하고 우선 함경북도 웅기(雄基)를 습격하여 경찰서·금융조합사무소 등을 폭파하고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병관이 무기책임자가 되어 장총·권총·탄약 등을 구입하여 각 사람에게 탄약 200발을 분배하고 동년 11월 26일 15명의 대원은 오소리강(烏蘇里江)을 건너 웅기로 향하였다.
1921년 1월 2일 만주 혼춘현 홍룡구(紅龍溝)에 도착하여 대안(對岸)의 경비상황을 조사하였으나 연시(年始) 특별경계 기간이라 도강(渡江)하기가 어렵고 월경조차 곤란한 형편에 웅기까지 무난히 가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문창학의 제의에 의하여 서방 40리 지점에 있는 신건원(新乾源)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공격날짜를 1월 4일로 정하고 전원을 3대(三隊)로 구분하여 제1대장을 그가 맡고 제2대장은 김병관, 제3대장은 강석훈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제1 및 제2대는 신건원 입구 양측 고지를 점령하여 수비대의 출동을 제압하고 제3대는 신건원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오전 1시 심야(深夜)에 예정된 부서에 배치된 전원은 수비대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주재소에는 일본 순사 5명이 있었고 한인순사 3인은 외출중에 있었으므로 이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전 40분만에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을 사살하고 동주재소를 파괴하였으며 수비대에게도 큰 피해를 준 후 전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갔다.
그는 그후 혼춘을 근거지로 정하고 한민회(韓民會)등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하여 일경 및 주구 숙청에 전념하였으나, 동년 12월 중순에 한인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문창학·최시능과 함께 혼춘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1923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 1923년 11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동년 12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90·39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96·97면
- 동아일보(1923. 6. 2, 6. 23, 9. 13, 11. 15)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12·675·67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7권 1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