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등 16명이 함께 모여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그런데 회원중 이탈자가 생겨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고, 또한 주동학생인 장재성, 박인성 등의 졸업으로 인하여 조직 내용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1927년 3월 해체되고 각 학교별로 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지용수(池龍洙)·강해석(姜海錫)등의 지도를 받고 광주농고생인 김만복(金萬福)·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붙잡혔다.
1930년 10월 27일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으며 대구복심법원에 공소,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완도에서 황동윤(黃東允)·최창규(崔昌圭)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32년 초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기관으로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재정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야학과 독서회를 통하여 농민계몽과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을 계기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되어 전남운동협의회가 탐지됨에 따라 그도 1934년 2월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장기간에 걸친 고문과 옥중 투쟁 끝에 그는 결국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다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65·1624∼1633·1654∼1708면
- 판결문(1930. 10. 27 광주지방법원)
- 판결문(1931. 6. 13 대구복심법원)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90·4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