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3. 1920년 7월
4. 1925년 7월 4일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의주군 광평면에서 시위운동에 가담한 후, 그해 4월 오동진(吳東振) 외 수 명의 동지들과 함께 남만주로 망명하여 청년단 조직에 진력하였다. 1920년 7월 청년단연합회의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吳東振) 및 이영운(李英雲)·한산(韓山) 등의 지령에 의하여 9월 18일 미국회의원단(美國會議員團)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 중요 도시·일제기관의 폭파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동지 임용일(林龍日)과 같이 폭탄을 휴대하고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돌아와 거사에 대한 준비 공작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이 이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은 실패하였다.
1925년 6월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에 근거를 둔 정의부(正義府) 군사부 별동대원 이진무(李振武)·홍학순(洪學淳)·김인옥(金仁玉)·김학규(金學圭)·이창만(李昌萬)·오동락(吳東洛) 등 6명과 같이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밀정을 암살하기 위하여 다시 만주 본영을 출발, 압록강을 건너 7월 3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차련관(車輦館) 뒷산에 당도하였다. 이때 마침 산중에서 목탄을 굽는 천도교 신자를 만나게 되어 그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평민으로 변장하기 위하여 한복과 짚세기를 마련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와 동지들은 군복을 한복으로 갈아입은 후 7월 4일 차련관 장터로 내려갔다. 중국인 음식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면서 차련관에 있는 일경(日警) 주재소를 습격할 계획을 협의하였다. 7월 6일 그와 이진무 등 동지들은 주재소에 당도하여 일경 4명을 사살하고 도피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후에는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이름을 광해(廣海)로 변명하고 천진(天津)·상해(上海) 등지로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1949년 10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02면
- 동아일보(1925. 7. 6, 7. 7, 7. 9, 1929. 7. 14, 12. 11字)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00·504∼5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