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2766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徐貞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08. 2월(음력(陰曆)) - 1909. 3월 정용대 의진(鄭用大義陣)에 소속되어 경기도(京畿道) 양주군(楊州郡)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일군(日軍)피체(被逮)되었다가 탈주(脫走)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정용대(鄭用大)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서정만은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을 가지고 이듬해인 1908년 음력 2월 6일부터 정용대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군의 정교(正校) 출신인 정용대는 군대해산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을 칭하고 수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적성(積城)·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걸쳐 접전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서정만은 이같은 정용대 의진에서 종군하다가 1909년 3월 5일 자택에 돌아와 있던 중 같은 달 13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회암면(檜岩面) 조미현(鳥尾峴)에서 일본군 제2토벌대 및 제2정찰대 연합대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경에게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천현면(泉峴面) 원원리(遠遠里) 산중에 총기를 은닉하였다고 말한 뒤, 같은 달 18일 현장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3집 520면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서정만(관리번호:12766)
*오류 제목
*오류 유형
*오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