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미 3월 15일(음 2월 15일) 편항 시장에서 유동수(柳東洙)를 만나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도 이 틈을 타 독립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면 반드시 조국이 독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그의 찬성을 얻었다.
3월 15일에는 유동수·유교희(柳敎熙)·박재식(朴載植)·이강욱(李康郁)등 7명의 동지와 함께 편항시장의 공동 타작장( 落場)에 모여 장날인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진행방법으로써 만일 일본 경찰이 제지하면 편항주재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각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케 하기로 하고 자신은 대곡동(大谷洞)과 위동(渭洞)을 담당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명의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그를 강제로 체포해 갔다. 그리하여 191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건물 손괴·가택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9월 25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5. 31 대구지방법원)
- 판결문(1919. 8. 18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05·406·407·408·4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46·1347·1348·1349·1351·1352·13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