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7년 일제에 의한 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후기의병이 일어나 전국적인 항쟁을 이어갔다. 홍금만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음력 7월 19일에 정철화 의병장의 의병부대 30여 명이 그의 마을을 지나가며 “의병은 적당을 제거하고 의거하여 보국안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죽산군(竹山郡)·충주군(忠州郡)·청주군(淸州郡) 등지를 다니며 항일 투쟁을 수행하던 중 충주 방여탄(方汝灘)에서 일본 군병과 교전하다가 피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08년 음력 2월 9일 박춘식(朴春植)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에 가담하여 유태수(劉泰秀)·송금봉(宋今奉) 등과 같이 용인 성산리(城山里) 존위(尊位)와 마가실(麻柯室) 존위 집에서 화승총 값으로 각각 400여 냥을 거두고,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 같은 해 음력 2월 10일에는 박춘식·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강원도 김봉기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용인 성산리 존위와 이가(李哥)의 집에서 군자금 480냥을 거두고, 마가실(麻柯室) 이공록(李公祿)의 집에서도 군자금 450냥을 모금하였으며, 광주 전지리(前枝里) 서낭청(徐郎廳)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홍금만은 1908년 6월 17일 경기재판소(京畿裁判所)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기재판소:1908. 6. 1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41~4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