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음력 4월 경북 (慶北) 영양군 (英陽郡) 에 체류하던 신돌석 의진 (申乭石義陣) 에 투신하여 동군 (同郡) 석포 (石浦) 에서 동료 115명과 함께 활동하고, 청송군 (靑松郡) 청운역 (靑雲驛) 의 손부이 (孫富而) 로부터 군자금 100냥, 영양군 (英陽郡) 진보읍 (眞寶邑) 이방 (吏房) 의 집에서 군자금 200냥을 모집하였으며, 동월 청송군 (靑松郡) 이전평 (梨田坪) 의 신 (申) 부자 (富者) 로부터 350냥을 모집하여 당목 (唐木) 6필을 얻고 의복을 지어 포군 (砲軍) 에게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관군 (官軍) 에 체포되어 교형 (絞刑) 순국 (殉國)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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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진(義陣) : 의병의 군진. 의병 부대를 배치한 것.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조준용은 경북 영양 출신으로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에 참가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3월 13일 영덕에서 창의한 신돌석은 경상북도·강원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민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돌석은 일월산(日月山)·백암산(白巖山)·대둔산(大遯山)·동대산(東大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위협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구한국군의 합세로 군세를 크게 떨쳐 영양·진보·청송·경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온 신돌석은 평해·영양·울진·봉화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1월 18일 영덕 눌곡에서 김상열 형제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준용은 1906년 음력 4월 경북 영양에서 신돌석의진에 투신하여 영양 석포(石浦)에서 신돌석 휘하의 의병 115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리고 청송군 청운역(靑雲驛)의 손부이(孫富而)로부터 군자금 100냥, 영양군 진보읍(眞寶邑) 이방(吏房)의 집에서 군자금 200냥, 청송군 이전평(梨田坪)의 신부자(申富者)로부터 군자금 350냥 등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宣告書(1907. 2. 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집 419·420면
- 宮報(大韓帝國:1907. 5. 23)
- 皇城新聞(1907.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