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조삼룡은 서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일대에서 강기동의진(姜基東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강기동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장단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중, 체포 투옥된 많은 의병에게 옥문을 열어주어 구출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거의한 강기동은 각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양주·포천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해서지방(海西地方)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연기우(延基羽)·이진룡(李鎭龍) 등과는 1908년 6월부터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등 밀착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체포된 이은찬이 동년 6월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강기동은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격문을 띄우고 대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하였다. 이리하여 강기동은 경기도 포천·영평·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나아가 강원도 일대로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의병에 대한 탄압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1909. 9. 1~10. 10)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910년 한국병합 이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토벌작전(1910. 11. 25~12. 20)과 황해도에서 전개된 두 차례의 토벌작전(1910. 11 하순~1911. 4 중순, 1911. 9 하순~11. 초순)으로 의병들은 활동 기반을 잃고 말았다. 이리하여 강기동은 국내에서 점차 활동 기반을 잃고 북간도(北間島)로 이동해 가던 중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압송되어 서울 용산에서 총살되었다.
조삼룡은 1909년 3월부터 1910년 4월까지 경기도 양주군 일대에서 강기동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0년 1월 24일 강기동이 지휘하는 2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경기도 양주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0년 4월 1일 포천군 외소면(外小面)에서 체포되어 4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집 151~152면
- 皇城新聞(1910. 4. 3)
- 判決文(京城地方裁判所:1910.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