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남 무안(務安) 사람이다.
1926년 말, 항일학생결사 성진회(醒進會)가 조직된 후 광주학생의 항일의식은 고조되었으며 이러한 항일정신은 맹휴 및 독서회 활동으로 계승되어져 나갔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간 통학기차에서 있었던 한일학생의 충돌을 계기로, 광주학생의 항일의식은 민족적 항쟁의 차원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이러한 민족의식을 응집시켜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시위로 표출되어졌다.
11월 3일 오전에 일인학생들을 광주시내 각처에서 격파한 광주고보생들은 일단 교내로 들어와 노병주(盧秉柱)의 사회로 투쟁방법에 관하여 토론을 가진 후, 가두시위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그는 광주농고생을 대표하여 광주농고의 가두시위 참가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동일 오후 1시에 광주고보생 3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1930년 5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18면
- 판결문(1930. 2. 26 광주지방법원)
- 동아일보(1930. 2. 20, 2. 22, 3. 1)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0·247·250·251·1513·1514·1516·1519·152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3면
- 판결문(1930. 5. 15 대구복심법원)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