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그는 일제의 국권침탈로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1907년 김태원(金泰元:일명 金準)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의병장 김태원은 1907년 전남 장성에서 거의한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선봉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08년 1월 무동촌(舞童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장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을 사살하는 등 나주·영광·광주·함평 등 전남 일대를 누비며 맹위를 떨쳤다.
정낙중은 이와 같은 김태원의진에 소속되어 2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남 각처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고 마침내 광주 어등산(魚登山)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이 전사 순국하자, 그는 1909년 2월 박사화(朴士化)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박사화 의진은 1909년 6월 나주군 욱곡면(郁谷面) 방축동(防築洞)에서 일본 헌병과 보조원 4명을 기습 공격하여, 헌병 1명을 부상시키고 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또한 7월에는 영암군 종남면(終南面) 화수동(花水洞)에서 친일 동장 김치수를 처단하였으며 지도군(智島郡) 압해면(押海面)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정낙중은 이러한 박사화의진에 소속되어 전남 각지를 넘나들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어 1909년 8월부터는 나성화(羅成化)의진에 입진하여 대일항전의지를 불태웠다.
정낙중은 나성화의진에 소속되어 제4초 십장(第4哨 什長)의 직임을 맡아 군사들과 함께 전남 무안부(務安府) 삼향면(三鄕面)에서 일본인 율산학길(栗山鶴吉)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3월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868面
- 內閣告示(奎章閣 所藏)
- 統監府來案(奎章閣 所藏) 第1卷 1909∼1910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