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출신으로 1907년 유시연의진(柳時淵義陣)에 소속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출신으로 1896년 1월 결성된 안동의진의 선봉장으로 태봉전투(胎峰戰鬪)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이나 김도현의진(金道鉉義陣)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봄 경주 분황사(分皇寺)에서 열린 열읍 의병 대표의 모임에서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다. 유시연은 1908년 여름까지 안동군 임동면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와 동부지역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 대곡리(大谷里) 출신의 의병장 박인화(朴仁和)가 이끄는 박처사의진(朴處士義陣)과 영덕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 그리고 영양의 김성운의진(金成雲義陣) 등과 연결하여 일본군 토벌대를 공략하는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임동군 대전(大田)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인 뒤 동년 5월경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2년 유시연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8월 영주에서 체포되었다.
임한천은 1907년 음력 11월 28일 유시연의진에 참가하여 의병 백 수십 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안동군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0일 안동군 길안면(吉安面) 용담사(龍潭寺) 부근에서 일본군 및 한인 순사, 그리고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12월 21에는 의병 수십 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임북면(臨北面) 세천동(細川洞)에서 목면(木棉) 4필을 모집하였다.
임한천은 소위 폭동(暴動) 및 강도죄(强盜罪)로 기소되어 1909년 1월 2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공소하였으나 동년 3월 2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467~468면
-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1909. 1. 27)
- 刑事控訴事件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