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유창호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07년 음력 12월 유시연의진(柳時淵義陣)에 들어가 동년 음력 12월 17~18일경부터 1908년 음력 5월까지 경북 안동,영양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출신으로 1896년 1월 결성된 안동의진의 선봉장으로 태봉전투(胎峰戰鬪)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이나 김도현의진(金道鉉義陣)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봄 경주 분황사(分皇寺)에서 열린 열읍 의병 대표의 모임에서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다. 유시연은 1908년 여름까지 안동군 임동면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와 동부지역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 대곡리(大谷里) 출신의 의병장 박인화(朴仁和)가 이끄는 박처사의진(朴處士義陣)과 영덕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 그리고 영양의 김성운의진(金成雲義陣) 등과 연결하여 일본군을 공략하는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임동군 대전(大田)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1908년 5월경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2년 유시연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8월 영주에서 체포되었다.
유창호는 1907년 음력 12월 유시연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신사현(申士賢)의 권고로 유신연의진에 들어 가 일본군 수비대를 정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달 17~18일경 안동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고, 1908년 음 1월 27일과 음력 5월 6일에도 교전하다가 영양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영양헌병분견대(英陽憲兵分遣隊)의 취조를 받고 1908년 8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소위 강도죄(强盜罪)로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 資料15(國史編纂委員會, 1981) 義兵篇ⅳ
-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1908.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