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1909년 그는 이재명(李在明)과 함께 매국 오적(賣國五賊 : 朴齊純·李址鎔·李根澤·權重顯·李完用)을 처단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는 계획에 합의하고 이재명(李在明)과 같이 서울과 평양 및 각지를 내왕하여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錄)·조창호(趙昌鎬)·전태선(全泰善)·이응삼(李應三)·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김용문(金龍文) 등 여러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이용구(李容九)가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고 일제에 아부하여 우매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나라와 민족을 일제에 팔아먹으려고 하므로 먼저 이용구(李容九)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재명(李在明)은 누가 선동을 하든 조약에 직접 조인하는 놈은 이완용(李完用)일파이니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여 조인을 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여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그러나 이완용과 이용구를 동시에 처단하자는 안(案)대로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이완용 암살은 이재명·이동수·김병록이 맡고 그는 조창호와 이용구 암살의 책임을 맡았다.
여러 동지들과의 무기 및 복장 등 거사에 필요한 준비를 완료하여 마침내 1909년 12월 20일 이완용·이용구 등의 동정을 탐지하여 연락하는 책임을 맡아 활약하던 김용문(金龍文)으로부터 "이달 22일 오전에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매국각료들과 같이 명동성당(明洞聖堂)에 나간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다음날 있을 이재명·김병록·이동수 3인의 거사가 성공하기를 빌고 헤어졌다.
1909년 12월 23일 오전 11시 이재명이 명동성당 정문 앞에서 이완용 및 그의 인력거 차부를 비수로 찌르고 붙잡히자 그도 다른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1910년 4월 13일 경성재판소(京城裁判所)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12면
- 기려수필 156∼158면
- 매천야록 5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8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13·475∼477·484·485·488·492·501·502·508·512·515·520·522·553∼555·561·562·564·568·571·57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70·4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