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1월 4일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최익현은 윤 4월 13일(6월 4일) 태인(泰仁)에서 거의하기로 하고, 민종식은 4월 18일(5월 11일)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석환은 민종식의 의진에 입대하여 종사(從事)가 되었다.
민종식 의진은 충청도 홍산 지치(鴻山 支峙)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이들은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로 진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호서(湖西)지방의 요충인 홍주성을 무난히 차지한 의병진은 곧 민중들을 안심시킨 후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 때 문석환은 서기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의진의 지도부 인사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대 장 민종식 소모관 이만식
참모장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수문장 최선재
중군장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수성장 조병순
유격장 채경도 선봉장 이남규 박영두
좌군관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정해도
우군관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운량관 박제현 성재평
소모장 지우범
이들 홍주의진에 대한 적의 대공세가 전개되자 이에 의진은 병력 증강과 성첩의 수축 등으로 대처하였으나, 윤 4월 9일 다시 적의 공세가 급하여지고 새벽 3시경 큰 폭음과 함께 성 동문이 깨어지고 수많은 적군이 문안으로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의진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흩어져 이미 전세는 패색이 짙어졌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대장 민종식 등은 성을 탈출하여 재거를 기약할 수 있었으나 문석환을 비롯한 80여 명이 체포, 압송되어 서울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6월 상순에 이르러 70여 명이 석방되고 문석환은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두(李相斗)·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과 더불어 적을 끊임없이 꾸짖고 굽히지 않으므로 대마도(對馬島)로 귀양보내어졌다.
유배지에서 문석환은 많은 우국시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다 서남쪽에 자리잡은 한 섬
산을 지나 비 내리니 자못 서늘하구나
석양의 매미소리는 고향과 같으나
언어·의관이 다르구나
나그네 아홉 사람 고초를 겪으면서
만리 밖 고국의 안부를 편지로 들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니 혼미한 꿈속 인양 하구나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가!
(海水西南闢一灣 爲容九人同苦楚
過山乍雨動微寒 寄書萬里報平安
晩樹蟬聲如故國 回息過境渾如夢
殊方鵠舌異衣冠 成敗由天力難)
8월말에 태인(泰仁)·순창(淳昌) 의진의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이 대마도로 유배되어 와서 홍주 9의사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두 학문 있고 또 의기가 높던 인물들이었으므로 눈물로 해후하였다.
이들은 유형지의 외로움을 시로써 달래면서 살았다. 면암의 칠언절구에 대하여 문석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본디 바탕이 어디 간들 바뀌리
위아래가 거꾸로 바뀐 세상
옛 성인이 오늘의 세태를 가엾이 여겨
이러한 제도를 가르치셨으니 의식을 보존해야만 하리.
(素行隨處我無移 冠屢那堪倒置時
先聖應憐今日事 故敎此制保形儀)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던 중 연로한 면암이 병석에 눕자 문석환을 비롯한 의사들이 병구완하였으나 끝내 면암은 유형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었다.
면암의 장례에서 문석환은 사서(司書)를 맡아 정중히 모셨으며, 그 후에는 고국에서 온 운구반에 인계되었다.
문석환과 나머지 9인은 적의 감언이설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옥고를 치르다가 소위 조선 총독 장곡(長谷)의 특전(特典)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48·208∼222·299·8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5·356·357·359·36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97·107·86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