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9년 음 (陰) 3월 1일 안성군 (安城郡) 원곡면 (元谷面) 에서 동면 (同面) 가천리 (加川里) 주민이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하며 시위행렬을 시 (始) 하니 근 (近) 각리 (各里) 주민 (住民) 들이 내집 (來集) 하여 수천 (數千) 에 달하매 최은식 (崔殷植) 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선언식을 행한 후에 원곡면사무소 (元谷面事務所) 를 소훼 (燒毁) 하였고 다시 양성면 (陽城面) 으로 가서 그 면장 (面長) 들과 합세하여 면소 (面所) 주재소 (駐在所) 우편소 (郵便所) 의 건물은 후일 (後日) 신국가 (新國家) 에서 사용할 것이라 하여 그대로 두고 문서와 기구만을 소기 (燒棄) 하며 왜 자금업자 (倭資金業者) 륭수지 (隆秀知) 의 상점을 파괴하고 해산하는데 주모 (主謀) 하다.(독립운동사 (獨立運動史) p 171-172)
2. 그후 2차피체 (被逮) 되었으나 기묘하게 탈출하여 상해 (上海) 에 간지 얼마되지 않아 독립선전원으로 입국 활동 (入國活動)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상기 (上記) 원곡면 (元谷面) 시위사건까지 피소 (被訴) 되어 7년 복역 하다(독립운동사 (獨立運動史) p 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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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후 2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칠곡리(安城郡陽城面七谷里)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희용(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읍으로 시위행진하여 가던 중, 양성면에서 시위행진하여 오던 시위대열 1천여 명과 만나 서로 합세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순사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주동자들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홍찬섭은 체포되지 않고 용케 피신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임시정부에 들어가 지방 선전대로서 활동하였다.
후에 국내선전의 임무를 맡아 귀국하여 활약하다가 마침내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