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하여 시해되고, 이어 일제의 간섭에 의하여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은 의병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병구는 1896년 3월 10일 허 위(許蔿)·강일선(姜馹善) 등과 금산(金山)에서 거의하였다.
그날은 김천(金泉) 장날이었다. 먼저 이들은 금산읍에 있는 무기고의 병기를 거둔 후 인근 마을로부터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격문(檄文)을 각처에 보내고 금산읍에 머물면서 세 곳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관군은 공주병(公州兵)·경병(京兵)·대구병(大邱兵)을 동원하였다. 의병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관군을 당해 낼 수가 없어 결국 성주진(星州陣)이 먼저 함락되어 이은찬(李殷贊)이 체포되고 말았다.
허 위는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진천(鎭川)으로 진격해 올라가고, 이병구는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 적과 접전하여 용맹을 떨쳤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청국으로 청병하러 가던 중 의주관찰사(義州觀察使)에게 구급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여중룡(呂中龍)·우용택(禹龍澤) 등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언론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항일 투쟁으로 일제의 주목을 받고 1916년 구금되어 갖은 고문과 옥고(獄苦)를 겪었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황성신문 1905. 2. 10
- 남은선생 유집
- 초운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