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고광덕은 전북 남원 사람으로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책략이 노골화 되어가자 군자금으로 사재 3백 석을 내어 유생 70명을 의병으로 규합하였다.
당시 을미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은 같은 장흥(長興) 고씨 일문으로서 모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이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고광순의 의진에는 고광덕을 비롯하여 인봉 고제량(麟峰 高濟亮)·고광훈(高光薰)·고광채(高光彩) 등의 고씨 일문과 윤영기(尹永淇) 박기덕(朴基德) 등이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1907년 1월 24일(음 1906년 12월 11일) 창평 저산 분암(昌平 猪山 墳庵, 오늘날의 단양군)에서 창의(倡義)의 기치를 세웠으며, 고광순을 주장, 고제량을 부장으로 하며, 고광훈 고광덕(광수) 고광채 윤영기 박기덕 등을 참모로 하는 부서를 정하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이들은 남원 양한규의 연락을 받고서 2월에 남원(南原)으로 진격하였으나 양한규(梁漢奎) 등의 의병이 이미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시 남원성 포위전을 벌이다가 퇴각하였다. 4월에 능주(綾州, 지금의 화순군)를 점령하여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동복(同福)으로 진군하던 중 광주부 관군과의 접전에서 패하고 일시 군사가 흩어지는 불행을 겪었다.
그 후 그들은 의병을 규합하면서 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무기를 개량 제조하고 전법을 훈련하면서 대규모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때 군대 해산이 강행됨에 고광덕을 비롯한 녹천 의진의 의사들은 10월 17일 구례 연곡사(求禮 燕谷寺)에 본영을 정하고 부서를 개편하였다. 이 때에 고광덕을 비롯한 고광채 고광석(光錫) 고광명(光明) 등의 근친들이 유격과 호위를 담당하였고, 신덕순(申德淳)은 참모에,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주 일군 수비대의 불의의 내습을 맞이하게 되어 10여 명만을 남기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그 중의 하나는 고광덕(광수)이 이끌었고 나머지는 숭치(崇峙)를 넘어서 고광덕의 군대와 서로 응하도록 하였으나 설상가상으로 왜병들이 또 하동(河東)으로부터 양대(兩隊)로 나누어서 밤에 작은 길로 습격하는 바람에 고광순과 고제량은 전사하고 그 밖의 대원들은 흩어져서 운봉(雲峰) 함양(咸陽) 순창(淳昌) 정읍(井邑) 등지로 전전하게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녹천 의진은 그 후 해산되었지만 이들의 선구적인 의병활동은 당시 호남 경남 일대 의병 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고광덕 의병 부대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이석용(李錫庸) 의병 대장과 합류하여 남원(南原) 임실(任實)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35 6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02 403 592 5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