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윤인순(尹仁順)·정용대(鄭用大)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양주(楊州)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백영현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윤인순·정용대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윤인순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하여 경기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1908년 이후에는 30∼40명 단위의 소규모 유격방식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의병장이었다. 대한제국군의 정교(正校) 출신인 정용대는 군대해산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을 칭하고 수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적성(積城)·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걸쳐 접전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백영현은 동지 이건칠(李健七)과 함께 정용대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1908년 음력 12월 20일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리(白石面里)에서 군자금 6천 냥을 징수하였고, 같은 날 광석면리(廣石面里)에서 군자금 5천 냥을 징수하는 등 의병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9년 음력 6월 초 동지 30∼40명과 같이 병기를 휴대하고 같은 군 석적면(石積面) 덕두리(德頭里)에 주둔하면서 동지 이사용(李思容)·이장복(李章福)·김현기와 함께 3천 냥을 징수하는 등 주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8월 2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