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원주(原州)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중군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을사의병 때는 원용팔(元容八)과 함께 의병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박정수는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자 분연히 궐기하여 유인석 의진에 참여하였다. 유인석 의진은 1896년 2월 일본군과 15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3월 8일 제천(堤川)으로 다시 돌아와서 머물게 되었다. 이후 제천의진은 경군(京軍)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의 공격에 대항하여 5월 23일부터 대접전을 벌였다. 제천의 대회전은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 밤낮없이 4일간 지속되었는데, 양군의 사상자가 속출하는 속에 온 거리가 피바다로 변하였다. 결국 의병의 화승총은 비에 젖어 쓸 수 없게 되었고, 중군장 안승우(安承禹)는 정부에서 파견된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를 따르던 19세의 홍사구(洪思九)도 스승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에 박정수는 유인석의 중군 참모로서 중군장 안승우와 홍사구의 시신을 적진에서 수습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전투에 참여하고 보고들은 바를 적어 두었다가, 이강년 의병장의 창의록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과 안승우 의병장의 창의록인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등을 저술 편집하였다.
이후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륵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박정수는 삼계(三戒) 원용팔과 을사륵약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9월 중순에 만나 재거사를 모의하고, 각처에 격문을 보내며 의병을 집결시켰다. 이 때 원용팔의 이름으로 작성된 격고문(檄告文)은 실제로 박정수가 작성한 것인데, 여기에는 그가 을사의병을 일으키게 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소위 일진회(一進會)라는 것이 어떤 난적(亂賊)의 무리인지, 만일 저들 하는 대로 버려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이하고서야 말 것이다. 또 고문(顧問)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지방관의 직책을 빼앗고, 8도에 가득 차게 그 무리들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안을 그물질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올개미를 씨운다. (중략) 무릇 우리 8도의 충의지사(忠義之士) 그 누가 열성조(列聖朝)의 은덕에 젖고 쬐인 사람이 아닐 것이랴. 신명이 곁에 있으니 두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하며 간곡하고 준엄하게 말하였다. 그의 거의 취지에 따라 각 처의 지사 및 민중들이 그것에 공명하여 충북과 강원도 지역이 모두 호응하였으며, 원주의 동쪽 주천(酒泉) 지방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장병들이 1천 명이나 모여들었다.
문집으로는 『회당집(悔堂集)』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3·17·57·197·211·258·308·315·350·409·466·471·483·4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9·60면
- 의암문하동문록
- 호서의병사적(이구영편역, 1993) 474·50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165·335·7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