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평안북도 강계(江界)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의 강계 장날을 이용하여 김경하(金京河)·정준(鄭儁)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읍내 교회의 장로이며 명신학교(明新學校) 회계로서,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 교사인 김경하·정준 등과 만나 독립만세시위계획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에 그는 더 많은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기독교측·천도교측과 연락하여 21명 동지를 확보하였다. 3월 24일 그들과 함께 영실중학교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서명 날인하는 연판장을 작성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명운행(明雲行)으로 하여금 이를 보관케 하였다.
이튿날 다시 회의를 열고 거사일시를 4월 8일 오전 11시로 하고, 행동개시 신호를 읍내 남장대(南將臺) 교회의 종소리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영실중학교 학생들에게 2천여매의 태극기를 제작하게 하고 독립선언서도 2천여매를 등사하여 두었다. 이같은 모든 사전준비는 읍내 헌병대에서 악명이 높았던 계난수(桂蘭秀) 등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4월 8일 오전 11시 남장대교회의 높은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려 펴지자, 계획대로 영실중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이준겸(李俊謙)의 집 앞에 모였다. 이에 장봉준(張奉俊)이 대형 태극기 2개를 들고 선두에 서고, 북과 나팔소리에 맞추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그도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분견소를 지나 북문(北門)을 향하여 행진했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위협하다가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은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으며, 그도 결국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 그는 1938년 6월 3일 인도(印度) 간디의 독립운동 방법과 같이 민족운동을 일으키기에 앞서 금주저축운동(禁酒貯蓄運動)을 펴 민족운동 비용에 충당하자는 내용의 강연을 하다가 강계경찰서에 체포되어 다시 보안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징역 4월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1938. 11. 23)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5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82·4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90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76·1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