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평남 성천(成川) 출신으로 1907년 9월부터 연기우의진(延基禹義陣)에 가담하여 강원도 양구(楊口)·인제(麟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연기우는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부교(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이후 지홍윤(池弘允)·김동수(金東秀) 등과 기의하였다. 그러나 강화가 점령되어 김동수가 전사하고 지홍윤이 해서(海西)지방으로 진출한 후 연기우는 홀로 부하 60여 명을 거느리고 적성·삭령·철원·마전·장단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결성된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1908년 2월 연기우는 허위(許蔿)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적성(積城)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고 10월 교수형으로 순국한 뒤, 연기우는 강기동(姜基東)·이진용(李鎭龍)과 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대응하여 소수정예의 부대를 편성하고 유격전을 감행하면서 1910년까지 항전하였다.
연기우 의진에 가담한 박계천은 1908년 4월 18일경까지 의병 17명과 함께 강원도 양구·인제 등지에서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집 215~216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533면
- 判決文(京城抗訴院:1909.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