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부터
1923. 3. 25
1926년말
1921년
1923년
1922년
1921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하자 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어 만주 봉천성 관전현(滿洲 奉天省 寬甸縣)으로 건너간 그는 오동진(吳東振)을 단장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이용규(李龍奎)·김관봉(金寬鳳)·김광진(金光振) 등의 권유로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그리고 1915년 5월 18일,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단원인 김광진·고학운(高學運)과 같이 의주군 가산면 도금동(都琴洞)의 김준석(金俊碩)에게 일금 31원을 모금하였으며, 국내의 적기관 공격에도 활약하였다.
이후 다시 상해(上海)로 가서 1922년 10월 김 구(金九)·여운형(呂運亨)·이유필(李裕弼)·조상섭(趙尙燮)·손정도(孫貞道)·김인전(金仁全) 등이 결성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였다.
그는 한국노병회의 제7차 이사회(第七次理事會)에서 특별회원으로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1924년 6월 5일에는 채군선(蔡君仙)·박희곤(朴熙坤)과 함께 낙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 유학하여 수료한 다음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무원(警務員)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또한 공창렬(孔昌烈)·김상덕(金尙德)·박 진(朴震)·변금파(邊錦波)·신국권(申國權)·신언준(申彦俊)·엄항섭(嚴恒燮)·윤소야(尹小野)·장덕진(張德震)·조덕진(趙德津)·최남식(崔南植)·최충신(崔忠臣) 등과 함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그후 독립운동계의 선전기관인 상해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주간(主幹)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상해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6년 말경 이화익(李化翼)과 함께 재등실 총독(齋藤實總督)을 주살하고자 폭탄을 갖고 국내로 들어왔으나 나석주(羅錫疇)의 거사로 경비가 매우 엄중하여 실현치 못하였다.
그는 다시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활약하다가 결국 일경에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70·92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99·480·505·527·537·539·543·544·548·574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472·537·860·86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13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8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其2) 45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03∼805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75·184면
- 고등경찰요사 1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