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남 정평(定平) 사람이다.
정평군 정평면 풍장리(豊場里) 출신으로 1910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에 설립된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3년간 사관교육을 받고 1912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그후 박용만(朴容萬)이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창단한 국민군단(國民軍團)의 경리부관(經理副官)으로 활동하다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귀국후 1919년 기독교도에 의해 정평군의 3·1독립운동이 점화되면서 그는 원종집(元鍾集)·장예학(張禮學)·윤화락(尹和洛)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1919년 3월 7일 정평의 장날을 택하여 군중 300여 명을 규합하여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그를 비롯한 3명의 주동인물이 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들은 이해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 불복 공소하여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해 10월 출옥 후 윤치호(尹致昊) 집에 거주하면서 북경의 박용만과 비밀연락을 취하다가 1928년 박용만의 피살 소식을 듣고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가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68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218·219·22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716·800·802·810面
- 判決文(1919. 5. 17 京城覆審法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