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독립당원으로 일 경대 (日警隊) 및 중국국경대 (中國國警隊) 와 교전 하여 합이빈 (哈爾濱) 일본총영사 국길정보 (國吉精保) 송본 형사대 (松本刑事隊) 부장 (部長) 등 10여명을 총살하고 3명의 독립당원이 현장에서 피살 순국함. 최병호 (崔炳鎬) 도 이 순국 3의사 중의 1인임 (당시 군정서원 (軍政署員) ) 조선인 묘지에 안장
(석주유고 (石洲遺稿) 권2 (卷二) p.123~5)
(항일순국의열사전 (抗日殉國義烈士傳) p.295)
(동아일보 1924. 4. 13)
(한국독립운동사 (韓國獨立運動史) p.298)
(조선일보 19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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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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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24. 4. 16)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강원도(江原道)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에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나자 중동선(中東線)일대를 전전하면서 동지를 찾아다니다가 왕청문 영안(旺淸門寧安)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북진군(北進軍)을 새로 편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하여 그 헌병대원이 되었다.
1923년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으며, 1924년 4월 8일 김만수(金萬秀)·유기동(柳基東)과 함께 허얼빈도외 남십팔도구(哈爾濱道外南十八道溝) 중국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일본영사관 순사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를 사살하고 일경 2백여명에게 포위되어 계속 교전하다가 항복권유를 받자 "일본인의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버티었으며 결국 폭탄과 집중사격에 의하여 동지 3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4. 4. 13)
- 조선일보(1924. 4. 16)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90·55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68면
- 석주유고 2권 12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6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4권 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