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북 순창(淳昌) 사람이다.
처음에는 신보현(申甫鉉) 의진의 좌익장·선봉장으로, 나중에는 의병장으로 전북 순창·태인(泰仁), 전남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륵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김선여는 이같은 시기에 신보현 의진에 투신하여 좌익장 및 선봉장으로 1908년 4월 20일부터 1909년 3월 3일까지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신보현 의병장의 지휘 아래 총기 약 250정과 도검 10자루를 휴대한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북 순창·정읍(井邑)·태인, 전남 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3월경 신보현 의진에서 독립한 그는 전북 순창군 백방산(柏芳山)에서 김재화(金在化)·김응선(金應先) 등 40여 명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의진을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경까지 총기 30여 정과 도검 3자루를 휴대한 4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북 순창과 전남 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그는 일본군과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대열에서 이탈하여 민폐를 끼친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의병운동의 대의를 지켜갔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6월 27일 전북 순창군 상치등(上置登)면 구산리(九山里)에서 부하 의병 40여 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빙자하여 금품을 약탈하고 악행을 일삼은 자들을 총살, 처단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3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10년 4월 2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되었고,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됨에 따라 7월 1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663·664·783·784면
-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하권 111면
- 내각고시, 내란 및 폭동범에 대한 처벌 건(규장각문서 18039)
- 판결문(1910. 4. 21 대구공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