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陸軍步兵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의병에 투신하여 이진룡(李鎭龍)의병장 휘하 부장으로 평남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일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의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또한 함남의 마전도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그 뒤 1911년 김진묵(金溱默)의병장의 부장으로 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여 다대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후로는 부하 3~40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각도를 신왕귀래(神往鬼來)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한 바 있다.1913년 6월 3일 밤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한편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玉井里)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키 위해 7월초에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이렇게 격렬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채응언의 활약으로 인해 20여 명 이상의 일본헌병과 일제에 아부하던 부일한국인 밀정 등이 처단 당하자, 일제는 그를 체포하고자 소위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였다.이 조직은 평양 헌병대에서 일년 전부터 일본 헌병 상둥병과 보조원 4명을 1대로 하여 5개 대를 편성하여 대교(大橋)대장의 직속하에 두어 그의 체포에 진력케 하는 한편 현상금 280원을 걸어 일반인에게 밀고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그런데 마을 사람(일설로는 채응언의 처남이라고도 한다)이 밀고하여 평양 헌병대 성천(成川)분대와 파출소장 전중(田中瀞雄) 등이 출동하였다.이런 사실을 모르고 채응언은 약속한 군자금을 받으러 안광조를 데리고 밤11시쯤 산을 내려오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져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니 단도로써 육박전을 전개하여 30여 분 동안 격렬히 싸우다가 체포당하였다.그리하여 전중 상등병은 많은 부상을 입고 현상금 250원을 탔고 그의 보조원으로 그의 체포에 힘쓴 박성빈(朴聖彬)과 강태규(康泰奎)가 각각 50원, 20원씩을 받았다.그 후 7월 8일에 경무부의 전전(前田) 보안과장과 전중 상등병 등에게 호송되어 평양 헌병대에 구금되었는데 이 때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 평양시중은 일대 혼잡을 이루기도 하였다.일본 헌병중위에게 호된 심문을 받은 뒤 21일 평양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수감된 뒤 일인 검사에게 취조를 받고 소위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되어 8월 31일 사형선고를 받고 분개하여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 않다"로 항변하였다.감옥에서 자신의 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고 자결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다.9월 21일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그 해 11월 평양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으니 격렬한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투사로서 일생을 마치고 장렬히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3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670·8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52·1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