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1.
3.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용강(龍岡) 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이 행사하고, 행정을 실시하기 위한 통감부(統監府)를 서울에 설치한다는 망국조약이 오적(五賊) 대신들의 농간으로 억지로 성립된 사실이 알려지자 온 나라를 물끓듯하였다. 이에 그도 김하원(金河苑)·이기범(李基範) 등 기독교인들과 함께 국권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경고문을 지어 큰 거리에 붙이고 많은 민중 앞에서 격렬한 구국 항쟁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 수십명이 칼을 휘두르며 군중에게 돌입하여 여러 사람을 찔러 거꾸러뜨리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헌병 앞으로 대들며 "우리는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죽으려한다. 죽어도 영광이니 빨리 죽이라"고 하며 적에게 덤비니 일본 헌병은 칼을 함부로 찔러댔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기왓장과 돌을 던지자 일병들은 총을 쏘아 주동자들을 헌병사령부로 잡아갔다. 그도 이때 붙잡혀 수난을 당했다.
1910년 마침내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그는 국권회복을 꾀하는 한편 간도(間島)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하여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다가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1913년 2월 21일 동지 최남화(崔南華)·이원찬(李元贊)·이윤하(李允夏)·이성숙(李聖淑)·곽한우(郭漢禹) 등이 실형을 받았으며, 그도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1년 그는 다시 임시정부의 국내연락 책임을 맡고 전답을 팔아 평양경찰서 정문 건너편에 자전차포를 위장·경영하면서 연통제(聯通制)실시, 군자금 모집, 국내외 독립투사들의 연락처 제공 등의 활약을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전날, 사실이 탄로되어 다시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1913. 2. 11, 2. 25)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1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2권 37면
- 기려수필 8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