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1) 1919년
2) 1920년
3. 1920년 5월
4. 1920년 6월 19일 평양시내 3개처에 투탄하였음
5. 1921년 9월 14일 동지들과
6. 1921년
7. 1922년 1월
8. 1922년 1월 10일 강동군
9. 1922년 4월 5일
10. 1922년 4월 19일 13년형 언도 (동아일보 1922. 4. 21)
11. 1931년 5월 11일 만기
12. 1931년 7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강동(江東) 사람이다.
1919년 6월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에서 김승만(金承萬)·오순근(吳淳根)·김두만(金斗萬)·오능조(吳能祚)·이영식(李英植) 등과 함께 안동현임시의사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동년에 상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평남일대에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는 한편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성삼(劉成三)·명덕상(明德相)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정의단(正義團)을 조직,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결과 17만원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동년 6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김석황(金錫璜)을 비롯하여 여행렬(呂行烈)·김송혁(金松赫) 등과 평안·황해도 및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독립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군의 모집 양성과 일제기관의 습격 파괴활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창설되자 이에 가입하여 모험부장(冒險部長)으로 국내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1922년 1월에는 대동군 추을미면(大同郡秋乙美面)에서 강동·평양(平壤)·대동 3개 경찰서에서 동원된 일경의 추격을 받고 교전중 일경 식월(植月)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피하였다.
동년 1월 10일에는 강동군 만달면 대성리(晩達面大成里)에서 일경 100여명과 교전중 부상을 당하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22년 4월 5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구형받고 동년 4월 19일에 징역 13년형을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4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4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6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28·277·288·6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41·543·544·545·550·551·555·940·945·950면
- 매일신보(1922. 1. 12, 1. 19, 4. 21)
- 동아일보(1921. 8. 14, 1922. 1. 13, 1. 15, 2. 21, 3. 25, 4. 8, 4. 21)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8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0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7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