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일 그 행진이
3. 1921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9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院場) 장날인 3월 4일을 이용하여 최능현(崔能賢)·송현근(宋賢根) 등과 함께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반석면(班石面) 반육리(班六里)에 있던 반석교회(盤石敎會)의 장로로서, 2월 28일 볼일이 있어 평양에 왔다가 3월 1일 그곳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얻어 가지고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급히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원장(院場)에 들러 그곳 교회 지도자들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賢九) 등을 만나 평양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튿날에는 반석교회의 지도자인 최능현과 백이옥(白履玉)·송현근 등을 만나 반석·원장 두 교회가 중심이 되어 3월 4일을 기하여 원장교회의 합성학교(合成學校)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던 도중 그 일부가 발각되어 모락장(沙川市場) 교회의 간부 10여명이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3월 4일 오전 10시 독립선언식을 가졌으며, 시위군중이 모두 태극기를 손에 들고 원장장터로 행진하자, 장꾼들도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모락장의 시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모락장으로 행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위군중은 태극기와 나팔수를 선두에 세우고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모락장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한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오늘이 거사계획을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모락장 입구에 무장하고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시위군중들은 이에 위축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모락장 입구에 들어갔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그는 청년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대항하며 계속 전진하였다.
사태가 불리해진 일본 헌병 분견소장 좌등(佐藤) 상등병과 보조원 3명이 재발리 도망가려 했으나, 분노한 시위군중들은 이들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중이던 애국지사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모락장 진군의 목적은 일단 달성하였으나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의 만세운동 이후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어 사형과 장기복역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용케도 총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순천(順川)·원산(元山)·통천(通川)·강릉(江陵) 등지로 피신하여 검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에게 소위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궐석재판을 통하여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하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하였다. 그는 마침내 1921년 2월 9일(음력) 원산역에서 평양경찰서 고등계 주임형사 중촌(中村)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으며,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10월 17일 55세를 일기로 평양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789∼7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9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380·381·382·411·412·413·414·41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권 75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7면
- 동아일보(1922.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