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환직(鄭煥直)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1907년 8월 해산군인들이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06년 3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경북 영천에서 거의토록 한 바 있는 정환직은 1907년 재거의한 정용기 의병장이 같은 해 10월 입암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자 아들을 이어 직접 의진을 편성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이후 정환직 의병장은 의진을 소규모 단위부대로 재편성하고 경북 일원에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에는 흥해군(興海郡)을 습격하여 우편국 분파소를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11월에는 신녕(新寧)을 기습하여 분파소에 보관된 총기 60여 점을 노획하였고 같은 해 8일에는 청송군 유전(楡田)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달 16일에는 흥해를 습격하여 일경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사살하였다. 12월 7일에는 영덕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적병 20여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강봉학은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여 선두에서 활약하다가 붙잡혀 1909년 2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감형으로 만기 전에 출옥한 그는 대일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붙잡혀 1914년 7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같은 해 10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471面
- 朝鮮總督府官報(191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