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33
성명
한자 Homer Bezaleel Hulbert
이명 Bezaleel, 訖法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50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3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6년『대한제국멸망사』를 저술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였으며, 1907년부터 5월부터 7월까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늑약(乙巳勒約)과 일제의 한국 침략 부당성을 호소함
1919년 8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제의 식민통치의 잔학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며, 194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강연을 하고 신문에 기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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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886년 9월 육영공원을 개원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파송된 관리들과 함께 육영공원 절목(節目)을 만들었다.

1891년 천문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작하여 순한글판으로 발행하였다. 1891년 12월 육영공원 교사 고용계약이 만료되어 귀국했다. 서울에 있던 아펜젤러 등의 주선으로 미감리회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1893년 9월 다시 내한하여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의 운영책임을 맡고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중단된 최초의 영문 월간잡지『한국보고(寶庫)The Korean Repository』를 1895년 1월호부터 다시 간행하였다. 이 잡지 1895년 10월호에서 「한국의 왕비 시해」라는 제목으로 같은 해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와 낭인들이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 무렵 언더우드(H. G. Underwood)·에비슨(O. R. Avison) 등과 함께 암살 공포에 떨고 있던 고종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휴대하고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섰다. 11월 28일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춘생문 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나, 이 사건에 가담했던 중추원의관 안경수(安駉壽)와 친위대장 이진호(李軫鎬)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1897년 5월 미북감리회 선교사를 사임하고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맡았다.

1901년 1월 월간 영문 잡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이 잡지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시사적인 문제도 취급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에도 참여하여 10월 28일에 열린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았다. 1903년부터는 『더 타임즈The Times』지 객원 특파원을 겸했다. 1904년에는 AP통신 객원 특파원도 맡아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꾸준히 연구하여 1905년에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Ⅰ, Ⅱ권을 발행했다. 1906년에도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졌다. 그해 가을 고종황제가 그를 비밀특사로 미국에 보냈다. 미국 정부의 면담 지연으로 11월 25일에야 미국 국무장관 루트를 만나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12월 11일 고종황제의 “나는 보호조약을 인정하지 못하오. 조약은 총칼의 위협 아래 강압으로 이루어졌소. 나는 이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았으며 윤허하지도 않았소”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아 12월 14일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단지 파일만 철해 놓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05년 12월 12일자 『더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와 12월 13일자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지에 보도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고 1906년 6월초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6월 22일자로 ‘특별위원(Special Envoy)’으로 임명하는 특사증을 받았다. 고종황제의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벨기에 및 중국 정부를 방문하여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앞서 제반 문제를 조율하게 했다.

1907년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 그 동안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지에 실었던 기사들을 발췌 편집하여 『한국에서 일본인』을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반일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한국에 있던 재산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1909년 8월 비밀리에 다시 내한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퇴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종은 1909년 10월 조카 조승남을 통해 상하이 덕화은행에 예치한 자신의 예치금을 찾을 수 있는 서류와 10월 20일자로 된 위임장을 비밀리에 보냈다. 이 예치금을 찾아 우선 미국 은행에 예치해 두었다가 후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11월 초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여 상하이 주재 독일영사를 만났지만, 일본이 이미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뉴욕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은행가 재콥 쉬프(Jacob Schiff)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1911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성인 교육운동인 셔토쿠어 순회 강좌(Chautauqua Circuit) 강사로서 1922년까지 미국 전국을 순회하며 극동의 정세 및 한국의 역사 등을 강연했다. 언론과 저술활동도 계속하였다. 7월 14일자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지에 장문의 성명을 기고하여 한국에서 일제의 만행과 기독교 탄압 및 당시 재판중이던 ‘105인 사건’ 등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때 한국과 맺은 통상조약에 따른 고종의 도움 요청을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절한 것을 비판하였다.

이 기사는 『신한민보(新韓民報)』 1912년 7월 29일자에 번역 게재되었다. 같은 신문 1917년 8월 16일자에서도 “헐벗 박사는 한국역사를 저술…한국 옛문명을 자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문필 활동을 소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미국종군 기독청년회(YMCA) 연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군부대 강연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 강화회의 기간 중 그곳에 파송된 김규식과 여운홍의 한국의 독립을 청원 외교활동을 도왔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 각처를 다니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강연을 하였다.

1919년 8월 15일자로 공증한 「한국은 어떤가?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미주리주 상원의원 스펜서(Selden Palmer Spencer)를 통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제출하여 의사록에 실리게 하였다. 이 진술서에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일제의 한국침략 자료와 미국정부의 한국 도움 거절에 대한 자료 및 고종 황제의 상하이 덕화은행 예치금에 대한 확인서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9월 28일 시카고 청년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강연을 한 것을 비롯하여 미국 각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1920년 2월 23일 델라웨어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서도 한국사정을 강연하여 미국인의 동정과 후원을 요청하였다. 1924년 4월 중순부터 130일간 태평양연안 110처에서 매번 2회씩 한국사정을 소개하는 순회 강연을 하였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동안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한미협회가 공동으로 미국 워싱턴의 라파예트호텔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여기서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무렵 한미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1월 20~21일에도 오하이오 애쉬랜드(Ashland)에서 개최된 ‘한인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압제에서 조속히 해방되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희망에 대해서 강연하고, 미국인들이 도울 방안을 의논하였다. 특히 워싱턴에 기독교인친한회 사무실을 차렸다. 3월 16일자로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인을 돕기 위한 친한회 가입을 권고하고,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회원 확보 활동과 기부금을 부탁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하였다.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8월 11일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한민보(新韓民報)(1911. 10. 4, 1912. 7. 29, 1917. 8. 16, 1919. 8. 19, 10. 9, 1924. 1. 3)
  • 동아일보(東亞日報)(1950. 3. 1)
  • 경향신문(京鄕新聞)(1950. 3. 16)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9권 135~136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20권 399~400면
  • 헐버트의 만국평화회의 활동과 한미관계(한철호, 2008) 178, 179, 180, 181~183, 184, 194면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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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머 베잘렐 헐버트 訖法 미국 버몬트(Vermont) 주 뉴헤이븐(New Haven) 춘생문사건, YMCA, 을사늑약, 헤이그밀사, 3.1운동, 한국친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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