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30
성명
한자 胡漢民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대통령장
1912년 신규식(申圭植)이 한중 양국의 우의 및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함.
1921년 10~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무총리 신규식(申圭植)임시정부(臨時政府) 승인문제로 호법정부(護法政府) 대총통 손문(孫文)을 만날 때 호법정부(護法政府) 비서장으로 배석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함.
1926년 11월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데려온 한인 청년 10여 명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케 하고, 1931년 경 임시정부(臨時政府)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을 면담하고 한중연대를 통한 대일항전을 계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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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후한민(胡漢民)은 1912년 신규식(申圭植)이 한중 양국의 우의 및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였다. 신아동제사는 상하이에서 조직된 동제사를 모체로 했으며 한국과 중국의 혁명 지사들이 함께 모여 조직한 단체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선포는 신아동제사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19년에는 한국과 중국의 유력자들이 모여 흥국실업은행을 창립했는데, 이는 한중 양국의 친선을 실업 제휴를 통해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1921년 10월부터 11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문제로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孫文)을 만났다. 이때 그는 호법정부 비서장으로 배석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하여 후한민은 “한국은 동아의 ‘발칸’으로 한국문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되지 않으면 아세아주(亞細亞州)의 시국대세가 균형을 잃어 동아의 평화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1926년 11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데려온 한국 청년 10여 명이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황푸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중국 혁명에 필요한 군사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한국인은 1925년 7월 제3기부터 입학이 허용되었다.

1931년 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을 면담하여 한중연대를 통한 대일항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추헌수, 1971) 제2권 3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별집 제2집 397면
  • 기려수필(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71) 255면
  • 한국혼(韓國魂)(신규식 저, 민필호 편, 1971) 128면
  • 중국호법정부승인(中國護法政府承認) 한국임시정부(韓國臨時政府) 시말실기(始末實記)(독립기념관 소장)
  • 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추헌수, 1971) 제1권 98면
  • 독립신문(獨立新聞)(1919. 11. 15)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후한민(호한민) - 중국 광둥성(廣東省) 판위현(番禺縣) -
본문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孫文)의 후계 정치지도자 가운데 장제스(蔣介石), 왕징웨이(汪精衛)와 함께 3대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중요 정치인물이다. 1879년 12월 9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판위현(蕃禺縣)에서 태어나 청조의 지방관리이던 아버지를 따라 광둥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1887년 광저우(廣州)에 정착하였다. 11세 때인 1890년 아버지가 죽었고 2년 뒤 어머니마저 병사하였다. 이어서 형제(한 명의 형과 두 명의 동생, 한 명의 누이동생) 들이 모두 병사하여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였다. 다만 어릴 적부터 남다른 문재(文才)를 나타내 고전 공부에도 상당한 재질을 보였으며, 몇몇 서원(書院)을 거친 다음 1901년 과거의 일차시험인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1902년 친구인 우즈후이(吳稚暉) 등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東京)에 있는 중국 유학생을 위한 학교인 굉문학교(宏文學校) 속성사범과에 들어갔다. 얼마 후 우즈후이가 자비유학생 입학문제로 청 공사관과 마찰을 빚은 다음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자 이에 격분하여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광저우 우저우중학(梧州中學)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구국을 꿈꾸게 되지만, 1904년 겨울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교육을 통한 구국의 꿈을 접는다.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속성법정과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정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호세이대학 동기생으로 같은 광둥 출신이던 왕징웨이(汪精衛), 주즈신(朱執信) 등과 교유하며 혁명파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05년 8월 도쿄에서 만들어진 쑨원 중심의 본격적인 혁명단체 중국혁명동맹회 창립시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는 귀국 도중에 다시 도쿄로 돌아가 동맹회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의 편집 발간에 적극 참여하여 주편(主編)을 담당하였으며 쑨원의 구술을 문장으로 바꾼 「민보발간사(民報發刊詞)」를 비롯하여 「민보의 육대주장(民報之六大主義)」, 「민생주의를 비난하는 자에게 고함(告非難民生主義者)」 등을 집필하여 당시 혁명파와 대립하고 있던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중심의 이른바 보황파(保皇派)와의 논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7년에는 쑨원을 수행하여 싱가포르, 하노이로 활동지를 옮겨 동남아 화교들을 대상으로 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으며 동맹회가 조직한 국내 무장 혁명 활동인 황강기의(黃岡起義), 진남관기의(鎭南關起義) 등에 참여하였다. 한편 싱가포르에서는 『중앙일보(中央日報)』, 『남양총회보(南洋總匯報)』 등 혁명언론들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보황파 세력과의 논전을 이끌었다. 동시에 그는 동맹회 남양지부장을 맡아 동남아 지역 혁명활동과 화교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어서 1909년 홍콩에 만들어진 동맹회 남방지부를 지도하면서 황싱(黃興) 등과 함께 광저우신군기의(廣州新軍起義)를 주도하였다. 1911년 10월 우창기의(武昌起義) 성공 이후 광저우에서 혁명기의를 주도했으나 실패한 다음 홍콩으로 피신하였는데, 11월 9일 광저우에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광둥군정부(廣東軍政府) 최고위인 도독(都督)에 취임하였다. 1912년 1월 난징(南京)에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자 광저우를 떠나 난징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쑨원의 요청에 의하여 대총통부 비서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쑨원과 위안스카이(袁世凱) 사이의 협상에 의하여 쑨원이 임시대총통을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을 계임하게 되자 광저우로 돌아와 동맹회의 후계 조직인 국민당 광둥지부장과 광둥도독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쑹자오런(宋敎仁) 암살사건으로 인해 쑨원이 위안스카이 토벌전쟁을 일으키면서 위안스카이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1913년 6월 광둥도독에서 물러났으며 곧 이어 쑨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14년 쑨원이 만든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에 가입하여 여전히 쑨원의 지지자 역할을 하였으며, 중화혁명당의 기관지로 창간된 『민국(民國)』 잡지의 편집을 지휘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사망 직전인 1916년 4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 반위안스카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쑨원을 대표하여 뚜안치루이(段祺瑞) 등 군벌들과 정치적 협상을 이끌기도 하였다. 1917년 9월 광저우 호법정부(廣州護法政府)가 만들어지자 호법정부의 교통총장에 취임하였고, 군벌들과의 불화로 호법정부가 무너지자 쑨원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쑨원의 측근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또 1921년 광둥군벌 천즁밍(陳炯明)과 연합으로 광저우에 중화민국군정부가 만들어지자 군정부의 총참의(總參議), 정치부장 등을 맡았으나 1922년 6월 천즁밍의 반란으로 군정부가 설 땅을 잃게 되자 천즁밍 토벌전쟁에 나섰다. 1922년 경부터 시작된 쑨원과 코민테른 간의 협상에 의하여 코민테른과 소련의 국민당 지원에 힘입어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가 열리자 왕징웨이 등과 함께 5인 주석단에 피선되었다. 개조(改組)된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 광둥성장(廣東省長)에 취임하였고 쑨원이 북벌(北伐)에 나선 다음에는 광저우유수(廣州留守) 등의 요직을 겸하였다.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 이후 본격화된 국공합작(國共合作) 과정에서 점차 반공우파(反共右派)로서의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찍부터 지니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입장과 함께 국민당 내에서 경쟁적인 관계에 있던 왕징웨이와의 대립적 위치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하자 국민당 내의 분열은 본격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반공우파로서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는 한편 장제스(蔣介石), 왕징웨이 등과 정치적 경쟁 관계를 계속하기에 이르렀다. 1925년 8월에 발생한, 국민당 주요 지도자 랴오중카이(廖仲愷) 암살사건은 정치생애에 가장 어려운 고비를 가져다주게 된다. 랴오중카이 암살사건의 배후로 그의 족제(族弟)인 후이성(胡毅生)이 연루된 것을 계기로 모든 직위를 떠나 소련으로 강제성 외유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1926년 4월 귀국하기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며 국내 정치에 관여할 수가 없었고, 코민테른 대회 참석 등 부분적인 활동을 하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4월 북벌전쟁 중간에 상하이에서 발생한 장제스의 반공쿠데타인 4·12정변으로 국민당 내 좌우분열이 극에 달하며 국공분열이 시작되자 자신의 기본적 정치주장인 반공을 내세우며 장제스와 합작하였다. 이후 난징에 만들어진 중앙집권적 통일정부인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중앙정치회의 주석과 입법원장이라는핵심 지위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제스와의 정치적 합작은 1931년 2월말 발생한 이른바 탕산사건(湯山事件)으로 인하여 와해되기에 이른다. 그 세력 확장을 경계하기 시작한 장제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연행, 난징 근교 탕산에 감금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전국적으로 비판 여론이 비등하였고 특히 광둥파인 쑨커(孫科), 천지탕(陳濟棠) 등의 반발이 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여파로 1931년 5월말에는 광저우에 난징정부에 반대하는 별개의 국민정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1928년 난징정부 성립 이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던 반장제스 움직임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로 꼽힌다.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은 이러한 국내적 분열을 봉합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1월부터 상하이에서 열린 양측, 곧 난징과 광저우 사이의 협상회의를 통하여 결국 1932년 1월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일종의 연합정권을 형성하며 새로운 난징 국민정부가 꾸려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장제스에 대한 정치적 대립과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장제스를 ‘신군벌(新軍閥)’이라고 공격하였으며 1933년에 창간한 『삼민주의월간(三民主義月刊)』을 통해서도 쑨원의 정치주장인 삼민주의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장제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이어갔다. 이런 의미에서 말년의 정치주장은 항일, 공산당 토벌, 반장제스라는 3대 주장에 모아져 있다는 논의와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1935년 6월 유럽으로 외유에 오른 이후 장제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며 다시 합작의 가능성이 보였으나, 1936년 1월 귀국 후 광저우에 머물다가 5월 12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보도에 의하면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광저우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40여만 명의 추도객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차지하는 정치적 무게가 컸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는 중국국민당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그 자체만큼이나 관련이 많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지사들의 본격적인 중국 관내(關內) 지역 망명이 시작되는 1911년 말 이후, 초기 한인 독립운동지사들과 교류를 맺기 시작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규식(申圭植)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한인 망명자들은 1912년 초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난징을 방문하고 쑨원, 황싱 등과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임시대총통의 비서장(비서실장)이었던 그와 관계가 없을 리 없다. 이후 1912년 7월 상하이와 난징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지사들을 중심으로 관내지역 최초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同濟社)와 이 동제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중합작 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가 만들어졌다. 이때 신아동제사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신아동제사에는 중국 측 인사로는 쑹자오런, 랴오쭝카이, 천치메이(陳其美), 따이지타오(戴季陶), 쩌우루(鄒魯), 쉬치엔(徐謙), 장지(張繼) 등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이름이 포함되었다. 다음으로 한국독립운동 지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으로는 1921년 9월말에서 10월에 걸친 시기에 광저우 호법정부를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신규식이 광저우에서 활동하면서 쑨원을 면담하던 장면에서 확인되는 그와의 교유 사실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미국 대통령 하딩(W. G. Harding)의 주장으로 곧 열리게 된 워싱턴회담에 임시정부의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문제를 회의에 상정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을 대표로 사절단을 광저우 호법정부에 파견하여 쑨원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9월말 홍콩을 경유하여 광저우에 도착한 신규식 일행은 광저우 도착 직후 호법정부의 여러 요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면담 대상이 바로 당시 호법정부 총참의(總參議) 겸 문관장(文官長)이자 정치부장인 그였다. 신규식 일행은 당시 호법정부 외교부 차장이던 우차오추(伍朝樞)의 안내로 광저우 관인산(觀音山)에 있던 총통관저로 쑨원을 예방하게 되었다. 이 때 쑨원과의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들은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호법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 ② 중화민국 호법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 요청, ③ 한국 청년들에 대한 중화민국 군관학교 입학허가, ④ 500만 위안(元)의 차관 제공, ⑤ 일정한 지역을 임차토록 하여 한국 독립군의 양성에 사용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런 내용들은 쑨원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혁명파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의 가장 중요한 사실들이다. 그러나 미국 측의 호의적인 초청에도 불구하고 호법정부의 워싱턴회의 참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써 신규식의 원래 목적인 호법정부의 지원을 통한 한국 임시정부의 워싱턴회의 참석 노력도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신규식과 쑨원 사이의 회담은 중국 혁명파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실이었다. 이때 그의 역할 역시 중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24년 1월의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 대표대회 이후 본격화된 제1차 국공합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합작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와 관련해서도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확인된다. 광저우 황푸섬에 만들어진 황푸군관학교의 설립이나 운영과정에서 당시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 광둥성장 등 핵심적인 지위에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황푸군관학교 설립에 그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군관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에 밀접하게 관계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군관학교 내의 한국학생들과 교유도 빈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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