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한 학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3월 1일 오전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려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는 만세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비밀리에 해외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 현장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익명으로 해외 언론에 기고하였다.
4월 18일 일본군의 제암리교회 학살방화 사건 현장, 주변 수촌리, 화수리을 찾아 사진과 보고서를 남겼다. 3.1운동 관련 사진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 영문 사진첩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1919)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실렸다. 특히 그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을 비록한 일제의 만행 피해자 사진은 서울주재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쯔(Leo Bergholz)에게도 전해져 1919년 7월 17일자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었다.
1919년 8월 한국선교사 대표로 일본에 건너가 극동의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다. 하라(原敬) 수상을 비롯한 일본의 요인들을 면담하여 일제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 무렵부터는 일제가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기 위하여 실시되던 공창제도에 맞서 강연을 통하여 그 폐해를 역설했다. 한국 청년들이 이런 끔찍한 죄악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그의 반일적인 행동 때문에 일본 당국의 미움을 받고 테러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선교사로서의 임기가 만료된 1920년 4월 캐나다로 귀환하였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기회 있는 대로 강연이나 기고를 통하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불완전한 개혁을 비판하였다. 1970년 4월 12일 81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독립신문(獨立新聞)(1920. 4. 10)
-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관한 건(육군성:1919. 3. 6)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
- 경향신문(京鄕新聞)(1970. 4. 13)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6집 914, 1021, 1022면
-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김승태 유진 이항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부, 2012)